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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Jul 22. 2019

현실을 드라마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현실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것이 '관용'으로 가는 첫걸음

드라마 속 현실(現實)은 이해하기 쉽다. 주인공과 악당,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명확하다. 위기에 빠진 주인공이 등장하면 마음껏 응원해주고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당이 나타나면 있는 대로 욕을 퍼부으면 된다. 그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얻고 감정적 위안을 얻는다면 그걸로 드라마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드라마 속 세상처럼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 고정된 주인공이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의 시점(視點)에 맞추느냐에 따라 주인공이 바뀔 수 있고 그에 따라 악당도 달라질 수 있다. 단일(單一)한 대본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드라마와 달리 현실엔 등장인물의 수만큼이나 많은, 각기 다른 대본과 주석이 존재하는 셈이다.


물론 각양각색의 현실 속 대본 중에는 상대적으로 더 뛰어나고 설득력 있는 대본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다른 대본과 주석은 다 가짜고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만과 편견이다.


최근 한일 관계를 비롯한 각종 뉴스를 보면 이념과 성향에 따라 양분된 의견이 좀처럼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뉴스나 댓글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다. 이처럼 정치적 성향에 따라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고 사회적 갈등의 골이 깊어진 데에는 복잡다단한 현실을 드라마로 이해하려는 안일함,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게으름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야권의 탄핵 시도를 노 전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상정한 드라마적 시각으로 본다면 '부패,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부딪힌 흙수저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을까'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고 있던 나 역시 탄핵 정국에 분개하며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지켜내리라 다짐했었다.


하지만 당시 정국을 바라보는 시점을 살짝 틀어보자. '여소야대'로는 더 이상 국정을 꾸려가기 힘들다고 생각한 대통령의 승부수 띄우기, 혹은 여론이 자기편이라고 오판한 거대 야당의 조급증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떤가. 드라마의 주인공을 당시 야당 대표로 바꾼다면 당시 탄핵 드라마는 '최고 권력자의 도발로 진퇴양난에 빠진 야당 지도자는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란 전혀 다른 작품으로 읽힐 수도 있다.


어떤 시나리오가 더 현실에 가깝다고 보는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문제다. 다만 거대 야권을 거악으로 보는 시각이 선악(善惡) 구도가 보다 명확한 일일극이나 주말드라마라면, 이를 대통령의 승부수로 보는 시각은 현실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의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좀 더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미니시리즈에 가까워 보인다.




올해 초 지상파 방송에서 방영됐던 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은 툭하면 노동자들의 임금을 떼어먹고 거리낌 없이 해고하는 악덕 기업주를 심판하는 고용노동부 소속 특별사법경찰의 활약상을 그렸다. 기존에 볼 수 없었던 근로감독관이란 주인공 캐릭터를 등장시켜 일선 노동 현장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드라마보다 지난 4월 실제 근로감독관들을 인터뷰해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점을 취재한 한겨레신문 기사가 뇌리에 남았다.


김태령 과장은 서운함을 털어놨다. “임금 체불한 사업주가 출석 요구에 응하지 않아서, 진정을 낸 노동자의 요청으로 그 집에 같이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집 앞에서 진정인이 이러더라. ‘사업주는 회사 문 닫고 시골로 도망가 연락이 끊겼다. 아내는 몸져누워있고, 고등학생인 아들이 엄마 병간호하면서 둘이 지내는데 나는 도저히 안쓰러워서 못 들어가겠으니 당신이 혼자 들어가서 월급 좀 받아달라.’ 현실은 이렇게 명확한 선악 구도로 굴러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무조건 사업주에게 강한 철퇴를 내리지 않으면 일을 잘 못하는 것으로 호도되는 경우가 많다.    

- 한겨레 신문 4월 26일 자 <‘조장풍’ 아니지만…“체불임금 받아주는 우린 근로감독관”>

   

이처럼 드라마 속 선악 구도로만 설명되지 않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드라마에서처럼 현실에서도 악덕(惡德) 사장과, 약자(弱者)지만 강단 있는 주인공이 대립하다 결국 권선징악(勸善懲惡)적 결말로 깔끔하게 정리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와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장'이 각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그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에 따라 선과 악이 교묘히 뒤섞이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을 드라마적 시각으로 이해하려 하다 보면 상대방 얘기에 귀를 닫고 편협해지기 쉽다. 특정 사안에 대해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을 악당으로 치부하게 된다.


드라마 속 악당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물리치고 쫓아내는 것만이 능사다. 얘기를 들어줄 필요도 없다.  주인공을 해치려는 악당의 얘기를 들어봐야 변명이나 궤변을 늘어놓거나 뒤통수를 치는 것밖에 더 하겠는가.


이런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현실에서의 갈등은 깊어지고, 갈등의 골을 치유하려는 노력은 소원해지게 된다. 한 사회가 가진 에너지가 모아지기는커녕, 내부를 향한 총질에 서로가 만신창이가 된다.




바보상자라고 불리는 TV를 통해 드라마를 보듯, 현실을 드라마처럼 보는 데 익숙해지면 현실을 제대로 읽는 법을 익히지 못한다. 실제 현실과 자신보고 싶어 하는 현실이 유리된 나머지 현실감각마저 잃게 되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바보라고 부른다.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귀찮더라도 현실 속 복잡다단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피아(彼我)를 구분하기에 앞서 상대방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고  그런 주장을 하는지 살펴보려 노력해야 한다. 그런 연후에 상대방의 의도와 목적이 불순하다고 판단되면 그때 가서 비판하고 각을 세워도 늦지 않다.


드라마적 현실 인식을 멀리 하고 현실의 복잡다기함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상대방을 이해할 마음의 준비가 갖춰진다. 이런 현실 인식 속에서 이뤄지는 비판과 토론은 설령 적의 의견이라 할지라도 때론 수긍하고 때론 존경할 수 있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벌써 200년도 더 전에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권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한다.

아무리 우리가 속성(速成)으로 민주주의를 배웠다고 해도 이제는 민주주의가 관용(tolerance)을 기반으로 싹틀 수 있다는 것쯤은 숙지(熟知)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관용의 토대 위에서 만난 적은 미우나 고우나 함께 가야 할 동반자다. 조선시대의 사화(士禍)처럼 궤멸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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