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의 놀라운 암기력, 불완전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는 법 <클루지>
대니얼 래드클리프는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해리 포터를 연기한 배우다. 어려서부터 발음하기가 까다로운 마법 주문을 숱하게 외운 탓인지 이런 쪽으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듯하다. 지난 2014년 BTS도 단골로 출연했던 토크쇼 지미 팰런(Jimmy Fallon)의 '투나잇 쇼(Tonight Show)'에서 블랙칼리셔스(Blackalicious)란 미국 힙합 듀오의 <Alphabet Aerobics>란 곡을 라이브로 소화해 화제가 됐다.
이 노래는 알파벳 A부터 Z까지 각 기호별로 일부 전치사나 접속사를 제외하면 그 기호로 시작하는 단어만 이용해 가사를 만든 곡이다. 예를 들어 'A'로 시작하는 첫 번째 가사는 'Artificial Amateurs Aren't At All Amazing'이다. 이런 식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단어들의 조합을 속사포 같은 랩으로 정확히 발음해 내는 것이 포인트다.
래드클리프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 지난 2010년엔 영국 BBC 방송에서 100개가 넘는 원소기호의 이름을 끝없이 나열한 ‘The Elements(원소들)’ 란 노래를 완벽하게 소화하기도 했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수헤리베붕탄질산..’ 식으로 이어지는 원소기호를 나열한 노래다. 정확히 들리진 않지만 규칙적인 운율에 맞춰 리드미컬한 노래가 탄생한다는 게 신기한 곡이다
고등학교 때 배운 원소기호는 20여 개에 불과(문과 기준으로)했기에 앞글자만 따서 순서대로 쭈욱 암기하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았다. 하지만 100개가 넘는 이름을 일일이 외워야 한다면 이와는 다른 전략이 필요할 듯하다. 우리 뇌가 기억하기 쉽도록 뭔가 손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심리학과 언어학, 분자생물학을 통합해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는 개리 마커스 뉴욕대 심리학과 교수가 쓴 <클루지(Kluge)>는 우리 뇌가 왜 컴퓨터와 같은 방식으로 기억을 하지 못하는지 밝히고 이처럼 불완전한 뇌를 보완하는 방법에 대해 소개한다. 랩이나 원소들 같은 노래를 암기할 땐 '운율과 박자를 이용한 전략'이 유효하다고 말한다.
또 다른 고전적인 방법은 랩 음악처럼 운율과 박자를 이용해 기업을 돕는 것이다. 호머(Homer)는 육보격(hexameter)의 시를 읊었고 톰 레러(Tom Lehrer)는 ‘원소들(The Elements)’이라는 노래(”안티몬, 비소, 알루미늄, 셀렌이 있네, 그리고 수소와 산소와 질소와 레늄이 있네….”)를 불렀다.
[클루지], 63P
<클루지>에서도 소개된 '원소들'은 톰 레러란 가수가 19세기 코미디 오페라에 사용됐던 곡의 멜로디에 원소기호 가사를 갖다 붙여 만든 노래다. 톰 레러는 1950~1960년대에 주로 ‘원소들’처럼 비범한 노래들을 직접 피아노를 치며 부른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하지만, 하버드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하버드, MIT 등지에서 강의한 수학자이기도 하다.
원소들의 가사는 원소기호 1번인 수소부터 순서대로 어이지지 않는다. 레러는 수학자답게 공식을 만들듯 100개가 넘는 원소 기호의 이름을 운율에 맞춰 재배열했다. ‘~gen’ ‘~ium’ 등으로 끝나는 단어들을 대구로 배치하는 식으로 운율을 맞추고 있다. 클루지에서 설명한 운율과 박자 전략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굳이 책에서 배우지 않더라도 <쇼미더 머니(Show Me the Money)> 같은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뮤지션들은 '비트(박자)'만 던져주면 운율에 맞춰 스토리까지 갖춘 음악을 만들어낸다.
배우들은 "리듬, 구문, 각운 등의 단서를 이용해 다음 대사를 외울 뿐만 아니라, 자기가 맡은 인물이나 다른 등장인물의 동기와 행동을 강조하기도 한다."(63P) 훌륭한 배우들은 이 같은 과정이 자동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배우 박은빈씨는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대사를 쏟아내도록 작가에게 요청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폭포수처럼 대사를 쏟아낸 걸 보면 분명 대사가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도록 만드는 본인만의 비기가 있을 게다.
'클루지'란 “어떤 문제에 대한 서툴거나 세련되지 않은 해결책”을 의미한다. 애초 '영리한'이란 의미를 가진 독일어 단어 '클루그(Klug)'에서 유래했다는 이 단어는 컴퓨터 분야에서 사용되면서 주먹구구식, 임시방편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이 책에서는 대표적인 클루지 사례로 1970년 발사된 달 탐사선 '아폴로 13호'에서 이산화탄소 여과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승무원들이 비닐봉지와 마분지 상자, 절연 테이프 등을 이용해 임시 여과기를 만들어 낸 사례를 든다. 투박하고 불안하지만 어쨌든 조종사들의 목숨을 구했으니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80년대 인기 '외화' 맥가이버 또한 클루지의 대가라 할 수 있다. SF소설 '마션'은 주인공이 끊임없이 클루지를 통해 화성에서 살아남는 법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요약할 수 있다.
클루지는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론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류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인간 스스로가 클루지 덩어리가 되어버렸다. 인간의 신체를 살펴보면 지금 기준에서 볼 때 불합리한 구조가 너무도 많다. 대표적으로 '척추'만 보더라도 처음부터 직립보행을 염두에 두고 척추가 만들어졌다면 중심축이 되는 기둥을 최소 2개 이상 사용해서 무게를 안정적으로 분산시켰을 것이다. 거북목이니 목 디스크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인류의 진화는 기존에 있던 것에서 그나마 더 나은 선택을 하는 쪽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매끈하고 이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옛 체계 위에 새 체계가 얹히는 썩 아름답지 못한 과정"이 누적되다 보니 인간의 신체는 이상(理想)적이기보다는 클루지에 가깝게 변화해온 것이다. 진화는 ‘젠가’ 게임을 하듯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탑을 높이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이어져온 것인지 모른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간의 마음 또한 클루지라는 점이다. 즉, 인간의 마음 또한 신체 못지않게 주먹구구식으로 진화하면서 우리의 기억은 불완전해지고, 언어는 알아듣기 힘들어지고, 다이어트를 한다면서 손은 자꾸만 과자봉지로 기어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뿐 아니라 마음에도 ‘클루지’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손해 볼 것이 뻔한 상황에서 이성적인 선택을 하기보다 감정적인 선택을 하곤 한다. 하여 저자는 "자연이 언제나 독창적이라고 가정하는 대신에 인간 마음의 여러 측면들을 그 자체로서 살펴보면서 진정으로 위대한 것과 아쉬움이 남는 경우를 구별하는 것은 충분히 값진 일"이라고 말한다.
이어서 "우리가 진화해온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솔직히 들여다볼 때, 우리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고귀한 우리의 마음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클루지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건 지난 2008년이다. 이후 한동안 절판됐던 이 책은 최근 <역행자>란 베스트셀러를 쓴 자칭 ‘라이프 해커’ 자청이 자신의 책과 유튜브 등에서 ‘내 인생 최고의 책’으로 소개하면서 재출간되었다. 자청은 아예 재출간된 책의 추천사를 쓰면서 “클루지를 이해하면 의사결정력이 매우 좋아진다”고 말했다.
누구든 클루지를 읽는다고 해서 자청처럼 3개 법인 회사를 운영하고 구독자 5만명 이상의 유튜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클루지로 이루어진 우리의 뇌가 자꾸만 우리 의지와 다르게 작동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뇌의 오작동을 개선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게 된다면 분명 전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옳은 선택이 계속해서 쌓이면 남들보다 조금씩 앞서가게 되고 인생의 방향도 더 나은 쪽으로 흘러가는 것이 인생의 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