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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Oct 14. 2022

그곳에 가면 '써머타임'이 흘러나온다

<망원동 브라더스> 알 수 없는 인생,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거다"

개그맨 이경규씨가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 <한끼줍쇼>의 첫 번째 촬영지는 서울 마포구 망원동이었다. 첫 방송에서 이씨는 자신이 영화로 만들려고 판권을 구입한 소설을 언급하며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 한 번 와보려고 했던 동네라고 지나가듯 소개했다.


<복수혈전> <복면달호> <전국노래자랑> 같은 영화를 제작, 출연, 감독한 이경규씨는 평생 10편의 영화를 만들겠다고 공언했었다. 가장 최근작은 고(故) 송해 선생도 카메오로 출연했던 2013년 개봉작 전국노래자랑. 이후로 차기작 소식은 들려오지 않지만 그 사이 이경규씨가 검토한 원작 중 하나가 '한끼줍쇼'에서 언급한 소설 <망원동 브라더스>다.


이경규씨가 판권을 사들일 때만 해도 <망원동 브라더스>를 쓴 소설가 김호연씨는 무명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후에도 김씨는 배경을 바꿔가며 꾸준히 소설을 집필했고, 결국 청파동을 배경으로 작년에 출간한 <불편한 편의점>으로 명실상부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경규씨 입장에선 판권을 미리 사두길 잘했다.



<망원동 브라더스>는 김호연 작가의 첫 번째 소설이다. 주인공인 30대 만화 스토리 작가를 중심으로 그와 인연이 얽혀있는 40대 기러기 아빠, 50대 이혼남, 20대 공시족 등이 마포구 망원동의 한 옥탑방에 모여 살며 벌어지는 지질하면서도 정감 가는 일상을 그렸다. 세대를 총망라한 네 남자는 도무지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막막한 현실 앞에서 밥 사 먹을 돈은 없어도 술 사 먹을 돈만큼은 꾸역꾸역 마련해낸다.


대낮부터 취해 있지만 그 와중에도 누구는 만화를 그리고 누구는 장사를 시작해 각자 살 길을 찾아간다. 자신에게 호감이 있는 줄 알았던 여성에게 이용당하고 옥탑방을 떠나려고 찾아간 곳에서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이렇다 할 갈등이나 반전이 없는데도 이야기는 흥미진진하게 앞을 향해 나아간다. 그건 아마도 밉지 않은 캐릭터들끼리 빚어내는 소위 '케미'가 소설 전반에 훈훈하게 흘러넘치기 때문인 것 같다.


<망원동 브라더스>는 작가 본인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난 2020년에 출간한 에세이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에서 김호연 작가는 망원동이 아닌 인천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았던 현실의 '브라더스'에 대해 얘기한다. 생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현실은 불안했지만 서로의 얘기에 공감해줄 친구와 선배가 곁에 있었기에 결코 외롭지 않았던 시절의 기억이 글로 옮겨지면서 불안했던 기억은 퇴색되고 따뜻한 감정만 살아남아 독자들에게 전달된 듯하다. 작가가 당시의 기억을 개인적인 추억으로만 묻어뒀다면 <망원동 브라더스>도, <불편한 편의점>도 없었을지 모른다.



김 부장과 포탄 크기의 카스를 세 병째 비우고 있는데, 재니스 조플린의 <썸머타임(Summertime)>이 흘러나온다. 주인장은 나를 기억한다. 이곳에 올 때마다 이 노래를 신청했고 주인장도 제니스 조플린을 좋아했는지, 언젠가부터 내가 오면 알아서 이 노래를 틀어주곤 했다. 노래를 들으며 맞은편 자리를 바라본다. 김 부장이 담배를 힘차게 빨고는 콧김과 함께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어느새 그의 모습이 담배 연기 뒤로 희미해지고 그녀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망원동 브라더스> 74~75P


소설이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가끔 '내 주변에도 저런 가게 하나 있으면 좋겠다' 싶은 술집이나 음식점이 등장하곤 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오나라(정희 역)씨가 운영했던 동네 술집 '정희네'가 그랬다. 줄곧 한 동네에 살며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낸 수 십 년 지기들이 이제는 머리가 벗어지고 배가 나와 중년의 삶의 무게를 나누는 곳. 늘 익숙한 얼굴들이 있기에 망설임 없이 들어설 수 있는 곳. 현실에 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좀처럼 존재하기 어려운 판타지 같은 공간.


망원동 브라더스에 등장하는 신청곡 틀어주는 술집 '올드 앤 와이즈'도 그런 곳이다. 이 술집에선 '자갈치와 새우깡, 가끔 고래밥' 같은 해산물이 기본 안주로 나온다. '카스와 맥스는 큰 병으로 팔고 외국 병맥주가 다른 가게보다 1000~2000원 정도 싸다. 한때 음악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30대 후반 사장님은 손님들로부터 신청곡을 받지만 꼭 틀어주는 건 아니다. 비틀즈를 신청하면 "오늘은 그 노래가 신선하지 않아서요"라고 말하며 천연덕스럽게 CCR 노래를 틀어주곤 한다.


직접적인 설명은 없지만 술집의 이름은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알란파슨스 프로젝트'의 노래 <Old and Wise>에서 따온 듯하다. 비틀즈의 사실상 마지막 앨범인 <Abbey Road>에도 참여했던 음악 엔지니어 출신 알란 파슨스(Alan Parsons)가 이끄는 이 그룹의 노래들은 라이브로는 원작자들이 연주해도 원곡의 맛을 살리기가 어렵다. 나 역시 노래방에서 몇 번 시도하다 물병이 날아오기 전에 중단하곤 했는데, 배우 조인성이 철거 용역 깡패로 나오는 영화 <비열한 거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 천호진씨가 뚝심 있게 부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올드 앤 와이즈에선 매일 수많은 60~70년대 팝송이 울려 퍼진다. 수많은 올드팝 가운데  소설에서 직접 곡명이 거론된 몇 안 되는 노래 중에 재니스 조플린의 <Summertime>이 있다.


스물일곱의 나이로 요절한 재니스 조플린은 굵고 짧게 살다 간 대표적인 록 스타다. 미국에서 히피 문화가 한창 성행하던 1960년대에 활동하다 1970년 생을 마감했다. 세상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몇 해 전 미국의 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코트니 해드윈이란 십대 소녀의 무대를 본 사람들은 '재니스 조플린이 환생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제는 그녀의 생전 모습을 본 사람이 거의 남아있지 않는데도 압도적인 무대 매너를 보여주는 가수가 등장할 때마다 사람들은 여전히 재니스 조플린을 떠올린다.


<Summertime>은 조지 거쉰이 작곡한 대표적인 스탠다드 재즈곡이다. 엘라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수많은 가수들이 불렀는데, 재니스 조플린 버전은 '같은 노래가 맞나' 싶을 정도로 독특한 해석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Summertime~'으로 시작하는 첫 소절을 다른 가수들은 예열하듯 담담하게 부르는데, 조플린은 이러다 '삑사리'가 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앙칼지게 냅다 내지른다.

짝사랑에 빠져 "어느새 그의 모습이 담배 연기 뒤로 희미해지고 그녀의 모습이 오버랩된다"는 주인공 영준에게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재니스 조플린의 'Summertime'만큼 잘 어울리는 배경음악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김호연 작가는 마흔 살에 <망원동 브라더스>가 세계문학상 '우수상'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세계문학상은 이전까지 대상 한 작품을 선정해 상금 1억원을 지급했었는데, 김 작가가 상을 받던 해에 우수상을 신설해 우수상 수상자들에겐 상금 없이 소설을 출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생계 때문에 절실히 돈이 필요했던 김호연 작가는 수상을 거부하고 다른 공모전에 응모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일단 한 곳에서 상을 수상하면 같은 작품으로는 다른 문학상에 응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수상하기로 결정한 결실이 <망원동 브라더스>다. 아직 영화 제작으로까진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대학로에서 연극으로 만들어져 상연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망원동 브라더스가 없었다면 코로나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 불편한 편의점의 성공도 없었을 테니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인생'이다.


"결국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거다. 인생은 알 수 없기에, 살아봐야 알기에 버틸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때 이번 소설이 잘 안 되면 다음 소설을 쓸 기회조차 갖지 못할까 걱정했다던 작가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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