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운전면허를 따고 운전을 하면서도 한동안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이미 내비게이션이 운전을 위한 필수 옵션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비게이션에 의존하면 길을 너무 모를 것 같아구입을 미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랬을까 싶다. 하지만 막상 지도 보는 데 익숙해지자 내비 없이 길을 찾아가는 일이 생각만큼 어렵진 않았다. 물론 종종 지도를 다시 보느라 차를 갓길에 세워야 했다. 그것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불만을 삭히곤 했다는 건 나중에 전해 들었다. 남들이 어떠했든 당사자인 내 입장에선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특히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
그러다 스마트폰이 등장했고 휴대폰에 내비게이션이 장착되면서 무료로 내비게이션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제야 비로소지도를 내려놓았다. 이제는 다시 돌아가지 못할 아날로그 운전의 추억이다.
김중혁의 단편소설<차오>에 등장하는 주인공 차시한은 내비게이션 시대에 지도 사용을 고집하던 나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다. 자동차 운전에서 자율주행이 '디폴트'가 되고 AI(인공지능)가 사람과 농담 따먹기를 하는 시대. 주인공은 여전히 '수동' 운전을 고집한다.
소설의 제목 <차오>는 주인공이 타는 차량에 내장된 인공지능의 이름이다. '차오'는 단순히 사람과 대화를 주고받는 수준을 넘어 자신만의 취향을 가졌다. 소설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죽음에 대한 자신의 견해("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건 살아 있기 때문일 거야")를 말하는가 하면, 자동차의 존재 이유를 두고 주인과 갑론을박을 벌이기도 한다.
"자동차는 굴러가라고 있는 거"라고 주장하는 주인공에게인공지능 자동차는'자율주행이 기본 기능으로 들어 있는 건데, 안 쓰면 아깝지 않냐'고 항변한다.
단편소설 <차오>가 수록된 김중혁 소설집 '스마일'
주인공 차시한의 직업은 미래 사회에 있을 법한 '위험성 평가위원'. '건축물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위험한지 아닌지 파악'하는 것이 임무다. 평소처럼 차량 속 인공지능 '차오'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수동으로 운전을 해가는 한가로운 퇴근길, 모르는 번호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지금 화면에 잠금 풀림 보이지? 그걸 눌러"
차오의 설명에 따라 버튼을 누르는 순간, 차는 해커의 손에 접수된다. 운전대가 작동하지 않는 것은 물론, 외부와도 연락할 수 없다. 창문조차 맘대로 안열린다. 휴대폰에 전달된 링크를 누르는 순간 휴대폰의 통제권이 피싱범에게 넘어가는 요즘의 피싱(phishing) 범죄보다 한 단계 진화한 버전이다. 무엇보다 금품이 목적인 피싱과 달리 차량을 맘대로 조작할 수 있게 되면 운전자의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다. 소설 속 상상이지만 외부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인해 순식간에 공포 가득한 밀실로 변해버린 차량 안을 상상하면 오싹한 기분이 든다.
(#차오) 뭐 들을래? (차시한) 아무거나. # 드라이브 중이니까 더 카스의 <Drive> 어때? 너무 도식적인 선곡 아니야? # 아무거나 좋다더니? 아무거나 좋다, 라고 말할 때는 혼란스러운 마음의 상태를 상대방이 알아주길 바라는 거고, 상대방이 절묘한 선택을 해주길 기대하는 거야. # 복잡하네.
이 소설에서 음악은 앞으로 전개될 스토리를 암시한다. 주인공이 차오에게 운전 중에 들을 노래를 선곡해 달라고 부탁하자 차오는 '드라이브' 중이니까 더 카스의 'Drive'가 어떠냐고 제안한다. 주인공은 '너무 도식적인 선곡 아니냐'고 했지만 이 노래의 가사를 살펴보면 다소 의미심장하다. "다 잘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계속 갈 수는 없어(You Can't go on thinking nothing's wrong)"란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차량이 해킹돼 범죄자의 손에 넘어가고 범인은 차오의 목소리를 빌려 대화를 이어간다. 그러다 범인은 '토킹 헤즈'의 <Road to Nowhere(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길)>를 추천한다. 범인에게 통제권이 넘어간 차가 어디를 향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선곡이다. AI와 자율주행이 디폴트가 된 미래에서 들려오는 두 곡의 1980년대 노래가 이질적인 두 시대를 부드럽게 연결한다.
1984년에 발표된 <드라이브>는 1976년에 데뷔해 1980년대에 활발히 활동했던 미국의 록 밴드 'The Cars'의 대표적인 히트곡이다. 빌보드 핫100 차트에서는 3위까지 올랐다. 여전히 국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종종 소개되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이다.
The Cars는 통통 튀는 신서사이저가 가미된 전형적인 80년대 사운드를 보여준다. 이에 비해 'Drive'는 카즈의 여느 곡과 달리 신서사이저가 잔잔하게 깔리는 감성적인 발라드다.
'Who's gonna~'로 시작되는 첫마디부터 착 감기는 드라이브의 매력적인 멜로디를 들어봤다면 누군들 끌리지 않을까. 조회 수가 1억 5000만 회가 넘는 이 곡의 공식 뮤직비디오 영상 댓글 중에 "나는 71세지만, 이 노래는 여전히 나를 울게 하네요"라거나 "십대 시절 새벽 2시에 침대에 누워 소니 워크맨으로 이 노래를 듣던 기억이 난다"는 등의 내용이 눈길을 끈다. 좋은 음악은 추억을 만들고, 추억은 나이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