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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Oct 22. 2022

음악은 그 시절 기억을 생생히 되살려낸다

사투리로 바꿔 부른 <예스터데이>가 왜 자꾸만 귀에 맴도는 걸까

이를테면 운전 중에 라디오에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가 흘러나오거나 하면,
기타루가 욕실에서 부르던 그 괴상한 가사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다.


어떤 노래는 옛 기억을 자동으로 소환한다. 내 경우엔 가수 이소라의 <믿음>이란 곡 전주가 나오면 군대 이등병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내무실 청소를 마치고 막간을 이용해 정훈실 사무실에 들어가 혼자 카세트를 틀어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왠지 위안을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끔은 당시 사무실에서 났던 진한 방향제와 담배 연기 섞인 냄새까지 기억이 날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예스터데이>의 주인공 다니무라는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들을 때면 대학교 2학년 때 만났던 친구 기타루를 떠올린다. 두 사람은 대학가 한 찻집에서 웨이터와 주방 아르바이트를 하며 처음 만났다.


삼수생이었던 기타루는 공부엔 관심이 없다. 대신 남들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곳에 열정을 쏟아붓곤 한다. 대표적인 것이 '사투리'다. 도쿄 토박이지만 현지 사람들도 못 알아챌 정도로 완벽한 '간사이' 사투리를 구사한다. 심지어 사투리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간사이 지방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와 반대로 주인공은 나고 자란 곳은 간사이지만 대학에 진학하면서 사투리를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사투리와 함께 기타루 하면 떠오르는 게 그가 제멋대로 가사를 바꿔 부르던 노래 '예스터데이'다. 부모님과 함께 도쿄의 부촌에 살던 기타루는 주인공을 집에 데려가곤 했는데, 집에 가면 혼자 욕실에 들어가 오랫동안 목욕을 하며 욕실 문을 사이에 두고 주인공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내가 아는 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에 일본어로(그것도 간사이 사투리로) 가사를 붙인 인간은 기타루 한 사람밖에 없다. 그는 목욕할 때면 곧잘 큰 소리로 그 노래를 불렀다.

어제는 / 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라네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 中 <예스터데이> 63P


그러던 어느 날. 기타루는 초등학생 때부터 알던 자신의 여대생 여자친구를 주인공에게 소개시켜 주겠다고 제안한다. 기왕이면 두 사람이 사귀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차피 딴 놈을 만날 거라면 너를 만나는 게 좋잖아. 너라면 내가 훤히 알고 있으니까. 게다가 너한테서 에리카의 근황도 들을 수 있고.”


첫눈에 봐도 미인이었던 에리카를 보고 자의반 타의반 첫 '데이트'를 하게 된 주인공. 하지만 에리카는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으며 자주 꾸는 꿈 얘기를 해준다. 커다란 배의 선실 창문을 통해 바다에 반쯤 잠겨있는 얼음달을 지켜보는 기묘한 꿈. 주인공 다니무라가 에리카와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를 하고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타루는 예고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그만둔다. 그들의 인연도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물속에 반쯤 담긴 얼음달. 두께는 20센티미터다.


주인공 다니무라가 기타루와 어울렸던 건 대학교 2학년 시절의 몇 달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6년이 흘러 우연히 에리카를 만난 주인공은 그 시절의 기억을 생생히 기억해낸다. 묻혀 있던 기억을 어제 일처럼 꺼내 쓸 수 있게 해주는 건 음악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예스터데이를 들을 때마다 사투리를 섞어 그 노래를 바꿔 부르던 기타루와 당시 그와 나눴던 대화, 주변 장면 등이 저절로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여느 소설처럼 극적인 사건이나 반전 없이 이야기는 밋밋하게 끝난다. 책 표지에도 등장하는, 에리카의 꿈에 나오는 얼음달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이 소설의 다른 작품들은 줄거리며 캐릭터가 거의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데 유독 이 작품만큼은 나에겐 전라도 사투리로 예스터데이를 부르는 기타루의 이미지로 계속해서 기억에 남았다.


"어제는 내일의 그저께고, 그저께의 내일이랑께~"


주인공 다니무라의 말처럼 "음악에는 그렇듯 기억을 생생하게, 때로는 가슴 아플 만큼 극명하게 환기해내는 효용성이 있기" 때문일까.



한때 재즈바를 운영했을 정도로 음악에 진심인 하루키 소설엔 음악 얘기만 따로 모아도 별도의 책이 만들어질 만큼 음악과 뮤지선에 대한 얘기가 자주 등장하고 언급된다. '여자들의 남자들'에 수록된 작품들만 살펴봐도 디렉 앤드 더 도미노스(Derek and the Dominos), 오티스 레딩, 도어스 같은 비교적 익숙한 이름부터 만토바니, 레몽 르페브르, 프랭크 책스필드, 플랑시스 레 같은 생소한 이름의 뮤지션들이 등장한다.


<예스터데이>처럼 노래 제목을 소설 제목으로 가져다  사례도 적지 않다. 이 단편집의 첫 번째 작품이자 영화로도 제작돼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드라이브 마이카> 또한 <노르웨이의 숲>과 <Michelle> <Girl> 등이 수록된 비틀스의 러버 소울(Rubber Soul) 앨범 첫 번째 수록곡이다.

'드라이브 마이카'가 아카데미 시상식까지 질주하긴 했지만 비틀스 노래 제목을 인용한 소설이 항상 환영받는 건 아니다.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가 처음 국내에 출간됐을 때 원작 제목인 <노르웨이의 숲>을 타이틀로 내세웠지만 반응이 별로였다. 국내 감성에 맞게 '상실의 시대'로 개명하고 나서야 소위 대박이 났다.


이 소설에서도 언급됐듯이 <Yesterday>는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이 공동 작곡한 것으로 발표됐지만 실제로는 폴 매카트니 혼자 작사, 작곡하고 노래까지 부른 사실상의 솔로 곡이다. 폴이 당시 여자친구의 집에서 자다 꿈에서 <예스터데이>의 멜로디를 듣고는 깨자마자 이를 옮겨 적어 곡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마치 꿈에서 신의 계시를 받아 음악을 완성한 듯한 에피소드는 명곡의 탄생을 둘러싼 대표적인 신화로 전해지고 있다.


다만, 신이 꿈에서 폴에게 '멜로디'는 내려줬지만 가사까지준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예스터데이가 만들어진 1960년대엔 휴대폰은 물론이고 휴대용 녹음기도 없던 시절. 폴은 번개처럼 찾아온 악상을 잊지 않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아무 가사나 집어넣어 노래의 형태를 갖췄다.


그렇게 탄생한 예스터데이의 최초 제목은 <Scrambled Eggs>였다고 한다. 잠에서 깬 직후라 배가 고팠던 모양이다. 폴 매카트니가 직접 밝힌 예스터데이의 최초 버전은 이랬다.

"Scrambled eggs, oh my baby, how I love your legs..." (스크램블 에그, 오 그대여, 내가 당신의 다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예전에 김기덕씨가 진행하던 '2시의 데이트' 같은 프로그램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순위를 발표하면 '예스터데이'가 늘상 1위를 차지하곤 했다. 이 노래의 구슬픈 가락이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의 감성과 잘 맞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해외에서도  예스터데이에 대한 평가는 몹시 우호적이다. MTV, BBC 등이 역사상 최고의 팝음악을 선정한 발표에서 예스터데이는 1위에 오르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비틀스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오직 한 사람의 머릿속에만 비틀스의 노래가 남아있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상상을 풀어낸 영화의 제목 역시 <예스터데이> 다. 영화에서 무명가수였던 주인공은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는 비틀스의 노래를 하나씩 발표하면서 순식간에 월드 스타로 부상한다. 비틀스가 사라진 사실을 모른 채 주인공이 친구들 앞에서 처음 부른 곡이 예스터데이였다. 예스터데이를 처음 듣는(?) 친구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와우' 였다.



소설 <예스터데이>에서 주인공은 기타루가 갑자기 연락을 끊고 잠적한 데에 상처를 받는다. 시간이 한참 지나 그 시절을 돌이켜보며 당시에 자신이 외톨이였고 몹시 외로웠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기에 주인공의 옛 기억을 불러오는 건 기타루가 사투리로 가사를 제멋대로 바꿔 부른 예스터데이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의 마음을 울린 건 예스터데이의 원래 가사였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모든 게 막막하고 외롭게 느껴졌던 20대 초반. 이유를 알 수 없는 헤어짐에 가슴앓이도 하지만 어찌 그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Why she had to go I don't know

She wouldn't say

I said something wrong

now I long for yesterday

(그녀가 왜 떠나야 했는지 모르겠어.

말하려 하지 않았으니까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겠지

(아무 걱정이 없던) 옛 시절로 돌아가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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