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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깎이 Oct 30. 2022

끝내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90년대 감성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와 비토 <우리 이제는>

판결문을 쓰는 게 업이다 보니 판사들 중엔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보수적인 법원 내 분위기 때문인지 작가와 판사 일을 오랫동안 겸업하긴 힘든 것 같다. 문유석 전 판사는 이미 현직 때 드라마 대본까지 쓰다 퇴직 후 전업 작가로 나섰고, 장편소설 <보헤미안 랩소디>로 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정재민 전 판사는 특이하게도 방위사업청 공무원을 거쳐 법무부 법무심의관으로, 사법부가 아닌 행정부에서 근무하고 있다. 


또 다른 판사 출신 유명 작가로 도진기 작가(변호사)를 빼놓을 수 없다. 판사 시절 수준 미달인 일본 추리소설을 읽다 '내가 쓰는 게 낫겠다' 싶어 겸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는 그는 장편만 10권 이상을 출간한 다작 작가이기도 하다. 


도진기 작가는 판사 시절 직접 형법 241조, 소위 '간통죄'에 대해 직접 헌법재판소에 위헌 신청을 내기도 해다. 당시 그가 쓴 위헌법률심판제청결정문을 보면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 판사를 오래 하긴 힘들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개인의 자유란 그것이 함부로 제약되었을 때의 손실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반면, 자유에 대한 통제의 효과는 눈에 쉽게 보인다. 따라서 권력은 개입과 통제를 선호하게 되는 속성을 갖지만,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이 해방되면서 사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해온 것을 돌이켜 보면, 국가권력은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유에 대한 통제를 최대한 자제하여 주는 것이 마땅하다.


신주영 변호사가 쓴 <법정의 고수>에는 판사 시절 도진기 작가의 얘기가 등장한다. 이 책에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등장하는 '소덕동 이야기' 에피소드와 위에 인용한 도진기 전 판사의 간통죄 위헌심판제청문 일부가 실리기도 했다. 신 변호사에 따르면 도진기 작가가 법원 정기 인사 때 더 좋은 근무처 이동을 마다하고 유임을 택했는데, 그 이유가 "제가 지금 쓰고 있는 방이 너무 좋아서 포기하기가 아까워서요"(<법정의 고수> 263P)였다고 한다. 방이 너무 마음에 들어 출세를 마다하겠다는 사람이 어찌 조직생활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 결국 그는 방 좋은 북부지법 판사 생활을 마지막으로 법원을 완전히 떠났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도진기 작가 소설의 대표적인 주인공 캐릭터인 '죽음의 변호사' 고진이 등장하는 작품이다. 장르상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러시아에서 살해된 40대 남성. 살해 용의자로 미모의 아내 김명진이 지목된다. 이들 부부는 1990년대 초 대학을 함께 다닌 불문학과 선후배 사이. 당시 살해된 남성을 포함해 4명의 복학생 동기가 짝사랑했던 명진을 두고 경쟁이 벌어졌고, 이들은 어이없게도 오래달리기를 통해 명진과 결혼할 상대를 결정하기로 합의한다. 결국 달리기의 승자와 결혼한 명진은 살인 피의자로 법정에 서고, '죽음의 변호사' 고진이 명진의 변호를 맡아 사건의 실체를 파헤친다는 내용이다. 


추리소설답지(?) 않게 곳곳에 레트로 감성이 묻어나는 이 소설에서 90년대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는 장치는 90년대 음악이다. 고진이 피의자 명진의 여동생과 이들의 대학 시절을 회상하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 의외의 노래가 등장한다.  


"복고풍 카페였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아르바이트생이 중년 손님들 사이를 오가며 주문을 받고 있었다. 허리가 푹 꺼진 소파는 푹신했고, 오래된 음악이 친근했다. 잠시 대화가 끊기자, 고진의 귀에 노랫말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제 너는 안녕을 말하며 나를 떠나려 하네 예전에 우리... 사랑했던 순간들을 넌 벌써 잊어버렸니.... 비토의 <우리 이제는>이 LP 긁는 소리에 뒤섞였다.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 386P


90년대를 추억하면서 공일오비토이의 노래가 흘러나왔다면 내 입장에선 무심코 책장을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그룹도 아닌 '비토'(Veto)라니... 그 시절 음악 좀 들었다 하더라도 '비토'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비토는 유희열의 토이처럼 기타리스트 민현이 중심이 되어 앨범마다 객원 보컬이 참여하는 '원맨 밴드'였다. 


이 소설에서 흘러나온 <우리 이제는>이란 노래는 특이하게도 비토의 1집과 2집에 모두 실렸다. 비록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1집에서 나름 인기곡이었던 까닭에 2집에도 새롭게 편곡해 넣은 것이다. 하지만 비토의 두 번째 앨범에서도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될 만한 히트곡은 나오지 못했다. 그렇기에 1990년대를 수놓았던 수많은 추억의 명곡 가운데 작가가 굳이 비토의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등장시킨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좀처럼 기억하는 사람을 찾기 힘든 비토의 노래를 기억하는 건 1997년에 발매된 비토의 2집 앨범에 친구가 객원보컬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본 조비(Bon Jovi)에 함께 심취했던 그 친구는 고등학교에 가자 직접 또래 밴드의 보컬을 맡더니 대학에 가서는 학교 록밴드 보컬까지 꿰찼다. 일찌감치 가수로 밥 벌어먹겠다고 나선 이 친구가 돈 받고 녹음한 첫 번째 앨범이 바로 비토 2집이었다. 이 앨범에 실린 <우리 이제는>도 이 친구가 노래했다. 



<우리 이제는>의 가사는 다분히 90년대스럽다. 여자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남자가 '한때는 내가 살아가는 힘이 된다고 하더니, 우리 사랑 영원할 거라고 맹세하지 않았냐, 그런데 어쩌다 이제 와서 나를 떠나려고 하느냐, 우리가 사랑했던 순간들을 벌써 잊어버린 거냐' 라며 애인을 설득하는 내용이다. 쿨하고 힙한 것이 대세라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찌질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시절 감성을 이처럼 진부하게 잘 표현해 낸 노래가 있을까도 싶다. 어찌 보면 4명의 남자가 한 여자를 두고 오래달리기로 결혼 상대를 정한다는 설정에 걸맞은 선곡이란 생각이 든다. 특히 누구나 들어도 알 만한 노래를 언급했다면 오히려 독자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을 텐데, 무색무취한 배경 음악 덕분에 90년대 분위기를 살리면서 대다수 독자들을 소설 속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다만, 도진기 작가가 어찌 그 시절 비토를 알고 기억해 자신의 소설에 써먹었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궁금증이 남는다. 혹시나 해서 노래 부른 친구에게도 물어봤지만 이제는 어엿한 엔터테인먼트 기업의 대표가 된 친구는 자신이 그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결국 <악마는 법정에 서지 않는다>의 결말은 명쾌하게 끝이 났지만 도진기 작가와 비토와의 인연은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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