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 삶의 목표가 하나 있다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이다. 더 큰 꿈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더 좋은 사람이 많아질 때만 가능하다고 믿는다. 여기서 ‘더 좋은 사회’란 단순한 물질적 풍요가 아니다. 그것은 서로를 조금 덜 미워하고, 조금 더 이해하려는 노력이 일상 속에 살아 있는 공동체다. 개인의 윤리적 고양과 사회적 성숙은 분리될 수 없는 두 갈래의 강처럼 얽혀 있다. 어느 한쪽이 메마르면 다른 쪽도 흐를 수 없는 것처럼, 결국 더 나은 개인들이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 성숙한 문명이 다시 지성 있는 시민을 길러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선 좋음이란 무엇인지부터 정의해야 한다. ‘좋다’는 말은 언뜻 보편적 가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어떤 이에게는 좋은 사람이 또 다른 이에게는 불편한 존재일 수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공자의 일화를 빌려보자. 제자 자공이 물었다. “마을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까?” 공자는 단호히 말했다. “좋은 사람이 아니다.” 자공이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마을 사람 모두가 미워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공자는 “그것도 좋다 할 수 없다”고 답하며 덧붙였다. “마을 사람 중에 선한 사람이 좋아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이 미워하는 사람만 못하다.” 이 대화는 분명한 사실을 드러낸다. ‘좋음’이라는 개념은 언제나 관계적이고 맥락적이다. 따라서 보편적 인기나 집단적 선호는 좋음의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선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선함을 ‘무해함’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무해하다는 것은 타인의 삶을 불필요하게 손상시키지 않는 태도, 곧 남을 도구로 삼지 않고 타인의 존엄을 침해하지 않는 자세다. 물론 무해함만으로 선함을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선은 때로 적극적으로 타인에게 이익을 주고 기회를 넓히는 차원까지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무해함’이 선의 가장 기초적이고 불가결한 조건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선한 사람은 정의로운 영웅이라기보다는, 우선적으로 남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지 않으려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나는 좋은 책을 읽고, 그것을 글로 정리할 때 비로소 조금이나마 덜 해로운 존재가 된다는 희미한 감각을 얻는다. 책 속 타인의 경험을 언어로 전유하는 순간, 나는 그 무게 앞에 멈춰 서게 된다. 그때, 나의 사고와 언어가 조금은 덜 폭력적으로 다시 세워진다.
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바로 그런 독자들을 위한 텍스트다. 그는 문학을 단순한 미적 향유가 아니라 존재론적 치유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진은영 시집을 평론하며 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온전한 존재가 되려는 힘이 강해지기 때문에, 삶이 부서진 어떤 사람에게 ‘예술적 자극’은 곧 ‘치유적 자극’이 되며,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인간을 ‘해결’하는 사랑의 작업이 되고, 그렇게 치유되면서 우리는 ‘해결되지 않은 분쟁’과 다시 맞설 힘을 얻게 된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하는 아름다움, 진은영은 그런 것을 가졌다.”
이 구절은 진은영의 시를 설명할 뿐 아니라, 신형철 자신의 문장을 설명하기에도 적확하다. 그의 문장은 독자를 더 온전한 존재가 되도록 이끈다. 읽는 순간, 언어는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치유적 자극’이 된다. 그 치유는 삶의 부서진 조각들을 덮어 감추는 봉합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직시하게 하고, 그 직시 속에서 다시 살아낼 힘을 길러주는 치유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는 경험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고통스럽게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고통스럽다.
그렇다면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가 왜 ‘덜 해로워진다’는 감각을 주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언어가 나를 변화시키는 방식 때문이다. 언어는 나를 구성하는 세계다. 좋은 문장을 읽으면 사고의 습관이 변하고, 좋은 문장을 쓰면 존재의 태도가 달라진다. 문학적 경험은 나를 타인의 고통과 아름다움 앞에 세우고, 그 앞에서 더 겸손한 사람이 되도록 만든다. 바로 그 지점에서 나는 ‘좋은 사람’에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느낀다.
하지만 신형철은 동시에 인간의 한계를 냉정하게 직시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심장은 제 주인을 위해 뛸 뿐, 타인의 심장 속에서 뛸 수는 없다. 이 한계 앞에서 그는 슬퍼하지만,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곧 포기를 뜻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에 다가가려는 시도—그 과정이 바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되지 못함을 알면서도 계속 시도하는 것.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인간다움의 외연을 확장시킨다.
물론 변화는 쉽지 않다. 그는 더 나아지는 일이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문학은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지만, 진짜 변화는 시행착오와 상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이 말이 주는 냉정함은 절망이 아니라 행동의 진실성을 요구한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변화의 보증이 아니라, 믿음의 지원군이 되는 것. 고통의 구조를 이해시키고 마음의 근육을 길러주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겸손함이 좋다. 문학 만능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문학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는 균형 감각. 그는 말한다. “지금의 나는 10년 전의 나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다. 10년 후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다면 가망이 없을 거라고.
그가 존경하는 사람의 기준은 분명하다.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끼는 사람.” 그런데 그런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라고.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사랑에 대해 말한다. 사랑은 “결여의 교환”이라고. 내가 그의 결여를 발견하고, 그 결여가 “못나 보여서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여 때문에 그를 달리 보게” 될 때 사랑이 시작된다. 그 순간, 상대방은 “내 결여를 이해해줄 사람”으로 다가온다.
“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다.” 결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결여가 더는 고통이 아닌 생”을 사는 것. 그런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제 나는 안다. 좋은 사람이란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타인에게 불필요한 상처를 주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 자신의 한계를 외면하지 않고 그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사람.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려는 사람. 끝내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고 닿는 노력을 이어가는 사람.
그래서 나는 계속 읽을 것이다. 그리고 쓸 것이다. 문장 사이에서 내 편협을 조금씩 좁히고, 타인의 고통에 조금 더 민감해지기 위해서. 그 시도가 실패로 끝나더라도, 실패를 감내하며 나아가는 그 길 위에서만, 나는 더 좋은 사람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어쩌면, 그 믿음 속에서 걸음을 내딛는 일이야말로 신형철이 말한 사랑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본문에서
"아이스킬로스의 소위 '고통을 통한 배움'이란 고통 뒤에는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고통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한 소식이다. 그런데 더 비참한 소식은 우리가 그런 교육을 통해서도 끝내 배움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교육이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내 존립을 위협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아가멤논과 스티븐과 우리 사이에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어 다른 많은 차이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신을 유지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 이것은 거부할 수도 박살낼 수도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킬링 디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인 것은 이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이 역설을 인정할 때 나는 불편해지고 불우해진다. 그러나 인정은 거기서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하는 것이다. <킬링 디어>의 첫 장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뛰고 있는 심장이다. 이 장면은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28p
"읽고 쓰는 일만으로 우리는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의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피 흘려 깨달아도 또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러나 믿을 수밖에. 지금의 나는 10년 전의 나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다. 10년 후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으면 가망 없을 것이다. 문학은 그 믿음의 지원군이다. 피 흘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을 나대로 시도해보았으나 결과는 이렇게 변변찮다. 수없이 다시 물어야 하리라."
- 177p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어쩌면 새로운 계몽의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보이는데, 이 계몽의 물결은 앞서 인용한 칸트의 저 문장에서 '지성'의 자리에 '감수성'을 넣을 것을 요청한다. 오늘날 '미성숙한'(즉, 계몽되지 못한) 인간이라 불리는 이들이 결여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성숙한(계몽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수성이란, '젠더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이라는 개념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즉, 무지'와 '미신')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의미한다. 이런 감수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나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시적으로 품고 있다는 뜻이다."
- 189p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과 그를 외면하지 못하는 결벽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타인에게 열려 있는 통각이 마비돼 있거나 미발달된 이들이 하는 정치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는 그런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진정성의 정치'를 믿는 것은 순진한 일일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선한 것에서 선한 것이 나오고 악한 것에서 악한 것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은 권력/폭력을 다루는 난해한 기술일 수밖에 없는 정치의 본질을 모르는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 베버의 가르침이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행위가 그렇지만 정치가 특히 그렇다고 말하면서, 정치 안에는 '근본적 비극성'이 있다고 말한다. (...) 정치 행위의 경우 그 결과가 의도와 동떨어져 있거나 심지어 정반대로 귀결되기도 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적었다.(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이 말이 감동적인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진정으로 옳은 일'이라는 진리를 또 한 번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 192p
"문학작품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업이라 어떤 작품을 선호하느냐는 질문을 더러 받는다. 평론가마다 다 다를 그 대답에 점수를 매긴다면, '깊이 있는 작품'이라는 답은 아마 낙제 점수를 받을 법하다. 진부한 데다가 별 뜻도 없는 말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작가들은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깊이'라는 게 뭐냐고 불평을 터뜨릴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말이 그리 싫지가 않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좋은 작품에는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의 깊은 곳까지 내려가서 그 어둠 속에 앉아 있어본 작가는 대낮의 햇살에서도 영혼을 느낄 것이다. 내게 작품의 깊이란 곧 '인간 이해'의 깊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을 존경하는가 하고 묻는다면 '깊이 있는 사람'이라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게는 한 인간의 깊이 역시 인간 이해의 깊이다. 인간의 무엇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 인가. 나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평범한 답을 말할 것이다. 물론 이 대답 역시 진부하게 들린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은 진부해지기는 커녕 날마다 새롭다. 세상에 진부한 고통이란 없으니 저 대답도 진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투표할 것이다. 깊은 사람에게, 즉 타인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느끼는 사람에게 말이다. (...)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내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 앞에서 대다수는 자신에게 편안한 길을 택하며 그것은 비난받을 일이 못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주 드물에도 고통이 더 많은 쪽으로 가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 (...) 환상을 품고 있지는 않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구세주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살아온 삶이 오늘의 그를 믿게 한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능력과 그것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는 능력 때문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치명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귀 기울일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말을, 반값 임금에 혹사당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말을, 차별당하는 소수자들의 말을. 그 고통을 알겠어서, 차마 도망칠 수 없어서, 무슨 일이라도 할 것이다. 대통령(大統領)이 대통령(大痛靈)이면, 우리 중에 가장 크게 아파하는 사람이면 좋겠다."
- 204p
"영화가 관객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르진 않으리라. 문학도 마찬가지다. 피해서는 안 되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안다. 최근 나는 한국 사회의 끔찍한 본질을 집요하게 재현하는 한 소설가에게 지지를 표명하면서 이런 문장을 적기도 했다. "'예술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유서 깊은 논의에서 '재현'이란, 현상의 복사가 아니라 본질의 장악이다. 남길 것과 지울 것을 선택하는 지성이 필요한 일이다. 또 독자에게 고통을 전이시켜야 한다.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고통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인지의 충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질의 장악'의 부산물이자 '인지의 충격'의 유발자로서의 고통, 그것은 옳다."
- 262p
"시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가 그의 책 <아름답고 무의미한>에서 보고하기를, 어떤 임의의 X에 대해 '나는 X를 좋아한다'와 '나는 X를 사랑한다'의 구글 검색 결과를 비교해보면, 대체로 '좋아한다'(like)가 '사랑한다(love)보다 세 배 더 많다고 한다. 예컨대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가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 X의 자리에 '영화', '미국', '맥주' 등등을 넣어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poetry)만은 결과가 반대여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왜일까?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
- 262p
"모든 관계는 일종의 교환이라는 생각이 출발점이었다. 사랑도 하나의 관계라면, 사랑 안에서도 모종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런데 여타의 관계와는 다른, 사랑의 교환 구조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이 '결여의 교환'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결여를 갖고 있다. 부끄러워서 대개는 감춘다. 타인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내가 그의 결여를 발견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의 결여가 못나 보여서 등을 돌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결여 때문에 그를 달리 보게 되는 일. 그 발견과 더불어, 나의 결여가, 사라졌으면 싶은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결여와 나누어야 할 어떤 것이 된다. 내가 아니면 그의 결여를 이해할 사람이 없다 여겨지고, 그야말로 내 결여를 이해해줄 사람으로 다가온다. 결여의 교환 구조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들을 대체 불가능한 파트너로 만들었으니, 두 사람은 이번 생을 그 구조 안에서 견뎌나갈 수 있으리라. 말하자면 이런 관계가 있지 않을까. 있다면, 바로 그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완전함'과 '온전함'을 분별할 필요가 있다. 사랑의 관계를 형성한다고 해서 내 결여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여가 없다는 의미에서의 '완전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상대방을 통해서 내 결여와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는 있다. 내 결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과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 결여가 더는 고통이 아닌 생, 그런 생을 살 수 있게 된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사랑은 나를 '완전하게' 만들지는 못해도 '온전하게 만들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지금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홀로 있을 때가 아니라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더 온전해진다. (...) 신이 있다면 그가 우리를 사랑하겠지만, 신이 없다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자 위대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사랑에 관한 한,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밖에요. 곁에 있어줄게, 우리가 온전해지기 위해서."
- 343p
"평론가가 쓴 글을 보고 어쩌면 이렇게 꼼꼼하게 분석할 수 있는가 하고 놀라는 분들이 있다. 어쩌다가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내가 슬쩍 누설하는 비밀은 이것이다. "평론가가 여러분보다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비밀은 작품을 여러 번 본다는 데 있습니다." 소설이건 영화건 그 무엇이건, 한 번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영화평론가에게 들은 적이 있는 말인데 좋은 영화는 최소 세 번은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에는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없고, 두 번째에는 비로소 구조가 보이기 시작하고, 세 번째쯤 돼야 영상과 음악 등에까지 신경을 쓸 수 있다는 것. 문학작품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한 번에 다 파악할 수 있는 천재도 있기는 할 것이다. 나는 천재가 아니라서 보고 또 본다. 보일 때까지 말이다. (...) 확실히 작품은 사람과 비슷하다. 첫인상이 전부는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하자면, 한 번 보고는 아무것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 나는 절실한 상처의 기록을 읽기 좋아한다. 인간의 마음을 찍는 사진이 있다면 그 사진에는 선인장처럼 온통 가시가 박혀 있는 마음의 형상이 찍혀 있을 것이다. 작가는 누구에게서나 상처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원효나 퇴계, 아리스토텔레스나 하이데거의 책을 읽으면서도 거기서 그들의 상처를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상처가 영혼의 본질이라 하더라도 문학이 상처의 기록에 그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품에는 상처를 달래는 지혜의 소중함과 어려움이 암시되어 있어야 한다. 생명을 죽이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남을 다치게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도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길도 인간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나와 남의 다친 영혼을 달래는 길뿐이다.(김인환, <의미의 위기>)"
- 39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