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 단편소설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
낚시터에 가면 거긴 완전 고기 반 질투 반이야. 다른 사람이 잡은 고기가 더 커 보이는 법이고, 내 자리만 안 좋아 보이고, 고기들이 다른 꾼들만 좋아하는 것 같고, 그런 법이야.
– [힘과 가속도의 법칙]
질투란 확실히 우리에게 엄청난 동기부여가 되는 감정임에는 틀림없다. 성공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지피기도 하고 인내를 감수하게 하는 버팀목이 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자기 스스로를 작아 보이게 하는 문제도 같이 동반한다. 비교를 하면 할수록 왠지 다른 사람은 더 커 보이고 나는 더 작아 보이고 그런 것이다. 질투란 놈은.
하지만 질투란 놈의 더 근본적인 문제는 관계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타인의 성공을 같이 기뻐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불쾌감을 조장한다. 반대로 타인의 실패는 안타깝지만 기뻐할 일이 된다. 질투가 많은 사람이 타인의 실패를 슬퍼한다면, 그건 진심이 아닐 것이다. 진심의 얼굴은 웃음이다. 그래서 질투는 가식과 위선을 낳기도 한다. 믿을 수 없고 겉과 속이 다른, 뭔가 의뭉스러운 사람으로 만든다. 참 고약한 놈이다.
어쨌든 질투는 나의 성공에 에너지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관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방해하고 악화시킨다. 관계를 위선과 가식으로 얼룩지게 만든다. 진짜 관계가 아닌 가짜 관계를 낳는다.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차라리 포옹을 해주지 않은 것만 못하다. 그것은 전혀 따뜻하지 않고 서늘하다. 오히려 외롭게 한다. 아니 그것은 외로움이 아닌 소외며, 상처를 동반하는 경험이다.
애인이 있는 사람의 외로움이 싱글의 외로움보다 더 아프다고 하지 않던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상처의 시간이다. 그래서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은 외롭고 아프다. 바로 현대인들이 외롭고 아픈 이유다.
“오랜만에 할 이야기 있다고 불러내서, 좀 멀쩡할 줄 알았더니, 너 똑같구나, 이규호.”
“알았어, 안 그럴게. 그냥 좀 안아주면 안 되냐?”
“뭘 어떻게 안아줘. 온몸에 가시가 돋아 있는데.”
고통 같은 것은 말입니다. 절대 얼굴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십니까? 그게 다 어디 붙는지 아십니까? 알코올에 달라붙어서 말입니다. 살에도 붙고, 조각조각 나서 뇌에도 붙고, 또 내보내려고 해도 손톱 발톱 그렇게 안 보이는 데 숨어 살면서요, 조용히 있다가 중요한 순간이 되면요, 제 뒤통수를 후려치고요, 그러는 겁니다.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반복되는 가짜의 관계, 가짜 대화, 가짜 위로, 가짜 포옹… 은 즉각적인 아픔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 가짜들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예절 형식과 같은 외관을 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는 아주 자연스럽다. 특별히 이상하거나 기분 나쁠 일이 없지만, 내 안 구석구석에 이런 가짜 경험들이 반복되고 축적되면 이들은 아픔으로, 고통으로, 통증으로 똬리를 튼다. 그리고 언젠가 이 통증들이 내 안에서 아우성칠 수 있을 만큼 쌓이고 자라면, 갑자기 심장이 답답해져 오고 머리가 지끈지끈하면서
작가는 이런 현상을 ‘뒤통수를 후려치고’라는 표현으로 시원하게 대변해 주고 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에게 뒤통수를 맞으며 후려친 원인을 찾아 화를 표출하지만 내 앞에서 나의 화를 감당하고 있는 상대는 정작 원인이 아니다.
우리는 원인도 모른 채, 어디서부터 어떻게 누가 뒤통수를 후려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끊임없이 뒤통수를 맞고 당하며 그로 인해 쌓이는 화를 스스로 감당한 채 살아가고 있다. 결국 인과관계란 중요하지 않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따져봐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은 채,
김중혁의 이 단편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이다.
인과관계의 앞 뒤가 사라진 진공 같은 상황에서 안으로부터의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의 반복.
“영화 속 상황이든 현실의 상황이든 다를 게 없습니다. 모든 상황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송미씨와 제가 하는 대화에도 어떤 의미가 있겠죠.”
“제가 보기엔 아무런 의미 없는 대화 같은데요.”
“아무런 의미 없는 대화란 없습니다.”
- [상황과 비율]
주인공들의 대화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역설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대체 이런 상황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상황이란 어차피 만들어지는 가짜일 뿐.’
다소 직접적이고 평이한 표현이 많아 작품성에 있어서는 살짝 갸우뚱하긴 하지만, 현대인들의 가짜 관계의 속살을 드러내는 데는 충실한 소설이다. 특히 모든 관계들의 설정에 있어서 인과 관계를 배제한 점은, 바로 이 소설이 관계를 다루는 이 전의 소설들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자, 지금의 세태를 반영하는 핵심이 아닌가 싶다.
문제를 제기했으면 수습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다. 특히 소설이, 소설가라면 더욱. 소설이 기획서도 아니고, 소설가가 정치인도 아닌데 어설픈 솔루션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지만, 김중혁 작가는 문제만 제기해 놓진 않았다. 작가에게 솔루션이 있다면 아마도 ‘희망’이 아니겠는가. 그가 말하는 희망을 들어보자.
어떻게 1초 1초를 지나왔는지 놀라웠다. 지나간 시간들이 쌓여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 가서 그 1초 1초가 어떤 의미들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 시침과 분침이 겹쳤다가 떨어지는 순간. 그건 멀어지는 걸까. 아니면 다시 가까워지는 중인 걸까. … 가까워지고 다시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시간, 영원을 향해 직선으로 흐르지만 결국 다시 돌아오는, 요요의 시간으로 하자. 그래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아.
-[요요]
이런 게 희망일 수 있을까 싶지만, 모든 단편 중, 그래도 가장 희망’적’인 단편은 맨 마지막에 실린 [요요]다. 희망적이라기 보다는 희망적이고 싶은 안간힘이랄까. ‘나쁘지 않아’라고 반복적으로 되뇌이는 건 그런 안간힘, 자기 위안을 반영한다.
그래,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는. 그 멀어짐과 가까워짐을 움직이는 건 시간의 흐름이다. 어쩌면 우리가 관계가, 우리가 관계하는 상황이, 우리의 관계를 흐르는 시간이 모두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저 시간이 흐르다 보면 자연스레 우리 사이엔 쌓여가는 것들이 있고, 한편으로 잃어가는 것들도 있다. 모두 시간이란 흐름 속에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되는지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일 지도. 초침과 분침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가, 그 영원의 반복 속에서 우리는 때론 설레고 때론 우울하고, 때론 기쁘고 때론 슬프고… 그 모든 반복 속에서 우린 성장하고 또 죽어가는 게 인생이니까.
그래도, 한번뿐인 인생, 가짜보다는 진짜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너와 내가 만나 한 마디 인사를 나눠도, 찰나의 눈빛이 마주쳐도, 서로를 안아줄 때도… 모두 진짜여야 하지 않을까.
소셜 미디어에서 너와 내가 서로 ‘팔로’한다 해도, 실제로 두 ‘팔로’ 안아준다 해도 가짜 ‘팔로’하는 포옹이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