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를 거머쥔 다큐멘터리, [AMY]
우리가 보게 되는 타인의 겉모습은 종잇장보다 얇은 존재의 표면일 뿐. 그 존재의 표면 아래에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어둠이 숨어 있다.
- 소설가, 더글라스 케네디
그렇다. 한 사람의 인생이란 단편적인 사건 몇 개와 이미지 몇 컷만으로는 아무것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매체만큼 한 사람의 인생을 왜곡시키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커뮤니케이션 방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대중매체만큼 사람들의 인식에 널리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매체도 없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그 자체로 안타까움을 넘어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누군가의 인생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진실'이라 할 수 있는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얼마나 왜곡되었고 얼마나 변형되었나. 과연 세상을 인식하는데 대중매체, 언론은 어떤 도움이 된단 말인가?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은 아닌가?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21세에 데뷔해 27세라는 짧은 나이에 사망한 싱어송라이터다. '천재 뮤지션'부터 '알코올 중독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별칭으로 불려지던 그녀는, 살아있을 시절이나 돌연 죽음을 맞은 이후에도 끊임없는스캔들과 가십으로 아직도 대중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연예인이다. 이렇게 온갖 루머에 휩싸인 연예인의 경우는그 이미지들이 차곡차곡 누적되어 결국에는 마치 그것이 그 사람의 본질인 것처럼 오염되어 버리고 만다. 사실 나 또한 이 다큐를 보기 전까진 그저 기이한 행동을 일삼고 술과 마약에 중독된 대책 없는 연예인 정도로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뮤지션이라고 해 봐야 그냥 목소리가 좀 특이해서 일약 스타가 된 행운아 정도랄까.
다큐멘터리를 보기 전 사전 학습을 위해 들었던 그녀의 정규 앨범 CD 2장은그야말로 훌륭했다. 2집 [Back to Black]은 크게 히트한 덕에 멜로디도 익숙하고 보컬의 매력도 좋았지만, 들을수록 1집 [Frank]가 더 좋아진다. 1집은 끈적끈적한 재즈의 그루브와 거친 소울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더 살아있다, 더 그녀답다는 느낌이다. 어쨌든 두 앨범 모두 보컬리스트로서, 뮤지션으로서 그녀의 재능을 한껏 느껴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면 생각이 조금 달라진다. 그녀의 앨범들이 훌륭하긴 하지만, CD라는 매체 또한 TV 같은 대중매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콘서트에 가본 사람이라면 잘 알 것이다. 무대에서 뿜어내는 고막을 찢을 듯이 울리는 사운드, 심장을 두드리며 피부 속 세포 하나하나까지 떨리게 하는 에너지. 흥분한 관객들과 뮤지션의 고함소리… 하지만 CD에는 그런 감흥이 담기지 않는다. 대중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도록, 그리고 반복 청취에 적합하도록 순화되고 정제된 녹음방식을 따르는 것이 CD라는 매체다. 그래서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라이브 공연이 CD보다는 노래하는 사람의 진실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덜 왜곡되고 덜 변형된 그 자체 그대로라고나 할까.
다큐멘터리 속 그녀의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날 것'이라는 말이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날 것 그대로의, 꾸미지 않은, 영혼을 토해내는 듯한 느낌의 노래. CD에서는 좀처럼 느껴지지 않던 ‘지금 이 순간’의 느낌.
날 것의 강렬함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녀의 라이브 공연은.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 또한.
다큐멘터리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자 시작된 장르이지만, 사실 다큐멘터리 또한 연출자의 관점이 반영될 수밖에는 없고, 인터뷰와 편집의 과정을 통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감정을 느끼도록 유도해 나간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연출이라 할수 있다. 그래서 단지 사실에 기초했다고 해서 다큐멘터리를 사실 그 자체로 보는 순진한 사람은 이제 없다. Fact를 소재로 했다고 해서 다큐가 Fact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Fact를 극화한 영화와 다큐의 차이가 모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Fiction과 Fact의 합성어로 Faction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도 그런 모호함을 반영한다. 다큐 같은 영화가 등장하고 영화 같은 다큐가 등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왜곡되지 않은 사실 그대로의 진실. 특히 유명인의 인생과 같이 궁금하기 그지없는 대상에 대해서는 더더욱. 게다가 유명인들이란 항상 가십과 스캔들에 휩싸이기 마련이라 도통 진실이란 건 알 수 없기 마련이다. 가십이 그토록 끊임없이 생산되고 입소문을 통해 꾸준히 확산되는 걸 보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정말 진실인가도 의문이긴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보기 전 들었던 CD는 그 자체로도 훌륭했지만, 사실 이 필름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와 몸짓을 듣고 보았을 땐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아! 내가 알고 있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는 그저 하나의 인형에 불과했구나
자신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하고 흘러넘치는 소울을 마구 뿜어내며 뜨겁게 불타고 있는 무대 위 그녀의 모습은 하나의 '불꽃'과도 같았다.그리고 그녀의 인생 또한 그랬다. 자신의 넘치는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며 오로지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았던 불꽃같은 인생. 그 불꽃같던 음악과 인생은 한 순간 타오르다 스스로를 완전히 연소해버리고 이내 스러졌다.
[AMY]라는 다큐멘터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이런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가십과 스캔들로 얼룩진 오염된 이미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진실, 한 인생으로서의 진실, 한 뮤지션으로서의 진실.에 대한 생각.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는
자칫 감춰지고 묻히고 말 그 진실들을 장인의 정신으로 하나하나 정성스레 복원해 낸다.
여기서 굳이 '하나하나 정성스레 복원해 낸다'라는 표현을 쓴 데는 이유가 있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녀의 사후에 별도로 촬영한 장면이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인가?
대개 다큐멘터리는 관련자, 전문가들의 인터뷰, 사건 현장의 취재영상들을 활용하기 마련인데, 이 다큐는 그녀가 사망하기 전에 촬영되었던 영상 클립들, 사진들, 공연 영상들로만 채워져 있다. 그러니까 이 다큐와 무관하게 촬영된 영상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영상들을 모두 뒤져 적절한 장면들을 추려내는 작업만도 고단하고 힘겨운 일일 테고 그렇게 추린 영상들을 끼워 맞춰 그녀의 인생을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해 낸다는 과정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일 것이다. 아니 단순히 어렵다는 것 이상의, 그녀에 대한 애정이 있지 않고서야 감히 도전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까.
모든 비평은 작품과 작가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다큐멘터리는 그녀를 아주 적절하게 비평하고 있다. 왜곡, 과장, 변형을 최소화했다 라고나 할까. 그래서 그녀의 삶과 음악을 아주 훌륭하게 복원해 내고 있다. 그리고 이 다큐멘터리는 비로소 그녀를 그녀답게 보여주는 최초이자 마지막 텍스트가 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방식을 굳이 택하여 다큐멘터리를 만든 아시프 카파디아(Asif Kapadia)의 심정을 나는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그만큼 객관성을 유지하고 싶었을 테고, 그건 그녀와 그녀의 삶이 얼룩진 채 사람들에게 버려져 있다는 안타까움이 컸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 다큐멘터리는 그런 안타까움으로 출발한, 그녀를 위해 흘리는 눈물 같은 게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 복원된 그녀의 삶과 음악은 그저 객관적으로 보여주는데 충실하기만 해도 그 자체로 빛이 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음악과 삶은 굳이 트릭과 효과와 포장이 필요 없을 만큼 그 자체로 빛나는 보석과 같기 때문이다.
진정 아름다운 보석은 조명 따윈 필요치 않은 법이다.
영화평론가 김세윤은 이 다큐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평면에 불과했던 한 사람의 인생을 입체로 표현한 다큐멘터리.’ 어쩌면 이렇게 명료하게도 이 다큐의 작품성을 정의하는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동안 평면으로만 존재해 왔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라는 한 인간의 삶과 음악을 3D 서라운드 입체로 감상해 보길 권해 본다.
하나 더, 이 다큐의 감독 아시프 카파디아가 복원해 낸 인간 이야기가 하나 더 있으니, 바로 불세출의 천재 F1 레이서 아일톤 세나의 이야기를 담은 [Senna]다. 이 다큐멘터리 역시 사후 촬영보다는 생전 영상들을 최대한 많이 활용한다는 측면에서 에이미와 유사한 특징을 가진다. 또한 인물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바탕으로 오해로부터의 복원을 위해 애쓴다는 측면 또한 유사하다. 무엇보다 불꽃처럼 살다 간 인생의 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에이미만큼이나 감동스럽다. 2011년 선댄스 영화제 수상으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은 필름이기도 하니, 한 번쯤 보길 권해 본다.
에이미는 떠났다. 고작 2개의 앨범만을 남겨둔 채. 요절한 천재와 그가 남긴 몇 개의 명반은 음악 역사에 흔히 있는 스토리 중 하나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수많은 뮤지션들 중 에이미는 단 하나였고,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녀와 같은 뮤지션은 없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노래,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소울만으로 누구와도 같지 않은 독보적인 음악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나 강렬한 음악을 들려주던 그녀가 그토록이나 약하고 불안한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찌 보면 그런 감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의 음악이 그토록 날 것의 강렬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아닐까도 싶다.
하지만 또 가정해 본다. 그렇게나 불안했던 그녀, 누군가의 보호가 절실했던 그녀의 곁에 그녀에게 헌신하는 단 한 명의 사람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러나 그녀의 주변엔 온통 그녀를 수단으로 득을 보려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남편에서부터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파파라치 기자들, 사진 촬영을 요청하는 일반 대중들까지. 누구 하나, 그녀를 유명인이 아닌 그녀로서 바라보고 손 내밀며, 그녀로서 지켜준 사람은 곁에 없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저 음악으로 그녀를 만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우리는 왜, 음악인들의 음악보다는 그들의 개인사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인가. 사실 단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사이도 아닐텐데 말이다. 심지어 그녀는 내 존재 따위는 이름조차 알고 있지 못한데도 말이다.
도대체 왜인가? 왜 음악만 들을 수는 없는 것일까?
다큐 마지막에 등장하는, 그녀가 남긴 말은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하고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만약 내 재능을 내주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