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코캐년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2006년 가족들과 미국 남서부 여행을 하던 중, 여행책자에 꼭 가볼 만한 곳으로 추천되어 있어서 방문했었는데, 그 때의 충격이 내가 미국 인디언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계기를 꼽자면, Tony Horwitz가 쓴 A Voyage Long and Strange라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은 미국 청소년 추천 도서 리스트에서 보고 우리 아이들을 위해 주문했던 것인데, 내가 흠뻑 빠져들고 말았다. 바이킹들의 전설에서부터 메이플라워호의 청교도들이 미국 땅에 정착하기까지 유럽인들의 미국 대륙 발견 및 원주민들과의 접촉에 대해서 광범위한 자료 조사와 여행을 토대로 설명해주는 책이다.
차코캐년으로 가는 길은 험하다. 30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한다. 2006년 여행 당시에는 RV(Recreational Vehicle)라고 부르는 캠핑카로 여행하고 있었는데, 차코캐년으로 들어가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캠핑카 부엌 수납장 문이 열리고 냄비 등이 떨어져 내려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후 13년이나 지났으니 이제는 이곳도 포장되어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보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비포장도로에서의 운전은 나름 도전적이다. 도로 노면상태를 끝없이 주시하면서 내 차의 바퀴가 어디로 진입해야 충격이 덜할지를 지속적으로 계산하면서 핸들을 조정해주어야 한다. 노면상태에 맞는 최적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너무 느리면 시간이 한없이 소요되고, 너무 빠르면 승객에게 핀잔을 듣거나 심할 경우 차량에 손상이 갈 수도 있다.
요즈음은 한국에서도 비포장 도로는 거의 없는 듯하지만, 내가 처음 운전을 배우던 80년대만 하더라도 지방의 국도조차 비포장인 경우가 많았다. 당시 아버지께서 비포장도로에서는 반대편 차선에서 오는 차가 없을 때에는 반대편 차선으로 주행하는 것이 차가 덜 흔들린다고 말씀하셨었다. 그 근거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차코캐년으로 가는 비포장 도로에는 오가는 차가 거의 없다. 반대편 차선으로 달려본다. 차가 좀 덜 흔들리는 것 같기는 한데….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 쓴 차에서 내려 차코캐년 비지터 센터에 들어가 처음 질문이 ‘이곳은 진입로를 왜 포장하지 않는가’였다. 직원은, ‘주체가 명확하지 않아서인 것 같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재정 문제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메사베르데와 같은 경우는 국립공원 전체를 연방정부가 소유하고 관리하지만, 이곳 차코캐년은 뉴멕시코주 산후안 카운티와 나바호 부족 영토가 혼재되어 있어, 국립공원공단은 단지 공원관리 업무만 맡고 있다고 한다.
차코캐년이 놀라운 것은 우선 그 규모이다. 아리조나 지역에서 호호캄 문명이 번성할 당시 뉴멕시코 지역에는 아나사지 문명이 번성했는데 그 중심에 차코캐년이 있었다. 차코케년에는 가장 큰 마을인 Pueblo Bonito를 비롯하여 10여개의 마을이 기원후 800년대부터 건설되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200여개의 마을들이 뉴멕시코주 서부 인근에 만들어졌다. 이 마을들은 잘 설계되고 관리된 도로망으로 연결되었는데, 그 도로망의 길이가 400마일(670킬로미터) 에 이른다.
차코캐년은 이러한 인근 푸에블로 마을들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당시 차코캐년의 교역망이 꽤 활발했음을 시사한다. 조개껍데기는 태평양 연안에서, 청옥석은 로키산맥에서 들어왔고, 최근에는 카카오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당시 교역망이 멕시코 남부지역에까지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차코캐년과 인근 도시들을 연결한 도로망
차코캐년 최대 마을인 Pueblo Bonito의 경우 800개의 방(최고 4층 규모)과 32개의 키바가 건설되었고, 주민의 숫자는 1200명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유적만 남아있지만, 그 복원도를 보면 그 규모와 형태가 놀랍다. 이렇게 큰 규모의 마을이 단일 콤플렉스처럼 건축되어 있다. Pueblo Bonito의 경우 약 300년간에 걸쳐서 점차 증축되어 온 것으로 보이는데, 처음부터 규모를 예정하고 건축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벽들은 사암을 깎아서 벽돌로 사용하고 틈새는 잔돌들과 진흙으로 채웠는데, 꽤 튼실하다. 각 방마다 문과 창까지 내었다. 당시 이들이 가지고 있던 돌 연장만을 이용하여 이처럼 많은 사암들을 다듬고 쌓아 올리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차코 캐년 푸에블로 보니토 복원 모형
고고학 발굴 조사에 의하면, 이들 유적의 건축은 1100년대 후반에 중단되었다. 그리고 이곳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어제 메사베르데 유적지처럼 갑자기 차코캐년이 버려진 이유는 불명확한데, 기후변화(극심한 가뭄)가 가장 유력하며 내부갈등, 외적 침입 등의 요인도 거론된다. 이들은 메사베르데로도 흘러갔고, 아리조나, 뉴멕시코 지역으로도 이주하여 지금의 호피(Hopi), 아쿠마(Acoma) 푸에블로 주민들의 선조가 되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푸에블로 보니토 유적 조감모형
다시 30킬로미터의 비포장 도로를 돌아나오며 아내에게 얘기했다. ‘차코캐년을 와 본 한국 사람은 좀 있을지 몰라도 우리처럼 두 번씩 와 본 사람은 아마 없을거야.’
다음 행선지인 아쿠마 푸에블로(Acoma Pueblo)도 2006년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다. 아쿠마부족의 마을은 110미터 높이의 메사 꼭대기에 지어졌으며, 이로 인해 Sky City라고 불린다.
부족 전설에 따르면, 북쪽에 살던 선조들이(차코캐년, 메사베르데로 추정) 하늘에서 새로 마련해 준 터전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들 부족에게 준비된 땅(Haak’u)은, 큰 소리로 ‘하쿠’라고 외칠 때 그 메아리가 들리는 곳이라고 했단다. 그렇게 이들은 1100년대부터 이곳 메사 꼭대기에서 살아왔다 (안내센터에서는 이 곳이 북미에서 가장 오래도록 지속적으로 현재까지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비위산 꼭대기에 위치한 아쿠마 푸에블로
아쿠마 푸에블로의 역사기록은 스페인 탐사대로부터 시작된다. 며칠 전 주니족 관련해서 언급되었던 스페인 탐사대장 코로나도는 주니 푸에블로를 시작으로 인근 푸에블로들을 차례로 접수한다. 아쿠마 푸에블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특별한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코로나도 부대는 이곳 아쿠마 푸에블로 마을에 대해서 유럽에서도 본 적 없던 천혜의 요새라고 언급하고 올라가느라고 힘들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마을은 사방이 낭떠러지 절벽이고, 출입하기 위해서는 바위틈새를 마치 록클라이밍 하듯이 짚어가며 올라야 했다. 스페인군은 갑옷을 입고 무기까지 지니고 있는 상태였으니 엄청난 수고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들의 기록에는 ‘우리는 이 마을에 올라가기로 결정했던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아쿠마 푸에블로 비지터센터
메사 꼭대기의 아쿠마 마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쿠마부족이 운영하는 투어에 참가해야 한다. 투어버스가 산 아래 비지터센터에서 관광객들을 태우고 산 위로 향한다. 우리는 3시 30분에 시작하는 마지막 투어에 참가했는데, 관광객이 우리 포함 모두 4명으로 단촐하다. 투어 가이드가 오늘은 프라이빗 투어를 한다고 너스레를 떤다. 투어 가이드 브랜든은 아쿠마부족의 역사를 설명함에 막힘이 없고 스페인과 멕시코 그리고 미국의 역사까지도 넘나든다. 본인이 역사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꽤 깊이가 있다.
아쿠마부족의 비극은 1598년 스페인의 오냐테라는 인물이 뉴멕시코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지를 만들러 오면서 시작된다. 오냐테는 뉴멕시코 중부 리오그란데 강변에 살던 원주민 부족을 쫒아내고 이곳을 산후안으로 명명한 뒤, 자신의 새로운 식민지 뉴멕시코의 수도로 삼는다. 이곳을 거점으로 인근 푸에블로들을 정복하고 통치해 나가게 되는데, 그 해 12월 그의 조카가 16명을 이끌고 아쿠마 마을을 방문한다.
이 과정에서 마을 주민들과 충돌을 빚게 되고, 조카를 비롯해서 대다수가 살해되고 4명만이 살아서 오냐테에게 돌아온다. 충돌 원인은 이들이 마을 주민들에게 강압적으로 무리한 요구를 하고 이를 들어주지 않자 약탈질과 겁탈을 자행해서라고 한다.
오냐테는 푸에블로 인디언들에게 본 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 강경진압에 들어간다. 스페인군이 아쿠마 마을을 함락시키는데 사흘이 걸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투어 가이드인 브랜든 설명으로는 스페인군은 첫 이틀 동안 마을 진입에 실패하자, 마지막 날에는 대포로 마을을 포격하였고, 마을이 초토화된 후에야 주민들이 항복했다고 한다. 이 사흘간의 전투과정에서 마을은 파괴되고, 6천명의 부족민 중 800명이 사망하게 된다.
오냐테의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인근 푸에블로들에 대한 경고의 목적으로, 포로가 된 아쿠마 부족민중 25세 이상 남자들의 오른쪽 발을 자르라는 명령을 내린다. 또한 아쿠마부족을 도와 전투에 참여했던 인근 부족인들 경우에는 오른손을 자른다. 형 집행은 푸에블로 마을들을 순회하며 이루어졌는데, 다른 부족들에게 보내는 경고와 위협의 메시지였다. 브랜든은 아쿠마부족이 3일간의 전투끝에 함락되었다는 얘기까지만 전하는데, 마지막 부분은 본인 입에 담기에도 차마 끔찍해서였을까?
우리는 인디언하면 얼굴에 무서운 칠을 하고 사람의 머릿가죽을 벗기는 잔인한 사람과 결부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잔인한 풍습은 인디언이 아니라 미국 대륙에 진출한 유럽인들이 먼저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금속도구가 없고 무딘 돌칼을 사용하던 미국 원주민들이 이런 풍습을 만들 수 있었을까? 유럽인들의 잔학행위는 스페인인들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들은 당시 원주민들을 상대로 사지절단, 화형 그 밖의 잔인하고 끔찍한 만행을 수시로 저질렀다.
뉴멕시코의 알칼데(Alcalde)라는 마을에는 오냐테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오냐테의 뉴멕시코 진출 400주년이 되는 1998년 밤, 누군가 동상의 오른 발을 잘라내는 사건이 벌어진다. 범인과 잘라진 발의 행방은 오리무중이 되었고, 인근 신문사로 ‘아쿠마 형제, 자매를 대신하여’ 라고 쓰인 편지가 전달되었다.
투어버스로 마을에 올라가면 흙벽 집들이 여러 골목에 면해 줄지어 있다. 1599년 오냐테의 공격으로 당시의 집들은 대부분 파괴되었고, 그 이후 재건되었다고 한다. 골목 모퉁이에서는 주민들이 도자기와 소품들을 팔고 있다. 모두 자신들이 만든 것이란다. 처음엔 구경할 만 했는데, 골목을 돌 때마다 이런 장면들이 등장하고, 그 때마다 브랜든은 우리를 이들 앞에 세워두고 시간을 준다. 흡사 저가 패키지투어 할 때 강제로 상점에 들르는 느낌? 조금은 부담되는 시간이다.
마을 중앙에는 흙벽 교회가 서 있다. San Esteban del Rey Mission이다. 이 교회는 1629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1년간의 공사 끝에 1640년 완공되었다. 교회 안을 들어가보면 커다란 통나무들로 된 서까래가 보이는데, 아쿠마 마을 인근에는 이런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 브랜든의 설명에 의하면 이들 나무는 40마일(66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테일러 산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주니부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회 건축은 모두 원주민들의 노동력으로 진행되었는데, 당시 스페인인들은 원주민들이 말이나 마차와 같은 것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단다. 그 먼거리로부터 통나무들을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지고 나르느라 건축이 11년이나 소요되었다고 한다.
산에스테반 델레이 교회
기독교를 배척한 주니부족과 달리 아쿠마부족은 모두 가톨릭 교도라고 한다. 이는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이 들어와서 부족신앙도 포용하는 관용적인 접근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 내부 장식은 아쿠마부족이 맡아서 진행했는데, 자신들의 신앙 상징인 산, 나무, 꽃, 짐승, 태양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교회 앞길을 내려가니 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브랜든이 ‘Welcome to Acoma National Forest!’ 라고 외친다. 실상은 마을에 있는 유일한 나무이다. 그 앞에 고여있는 물은 더 이상 식수로는 쓸 수 없단다.
아쿠마에 있는 유일한 나무
브랜든이 내 티셔츠를 보더니 메사베르데 다녀왔냐고 묻는다. 어제 산 티셔츠이다. 자신의 조상들이 그곳에 살았단다. 난 아내의 티셔츠를 가리킨다. 오늘 아침 차코캐년에서 산 것이다. 우리가 아쿠마 선조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라 하니 브랜든이 두 손의 엄지를 치켜 올린다. 의도치 않게 아쿠마 조상답사 여행이 연출되었다.
투어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어떤 집에서 나온 작은 소녀가 브랜든에게 달려간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자신이 색칠한 종이를 한 장 건네주며 꼭 껴안는다. 브랜든의 조카뻘 된단다. 자신과 같은 big sun 지파라고. 아이의 예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맘이 짠하다. 아쿠마 마을에 실제로 거주하는 주민 수는 수십 명 내외라고 한다. 모든 부족원 가족 별로 이곳에 집은 있지만 특별한 시기에만 방문하고 주로 산 아래에서 거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전기도 상수도도 보급되어 있지 않는 이곳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소녀를 생각하니 마음이 그렇다. 아내도 같은 심정인 듯하다.
이제 우리는 앨버커키로 향한다. 14일에 피닉스를 떠난 지 5일만에 만나는 대도시이다. 난, 김치찌개를 먹을 기대감으로 들떴다. 앨버커키는 뉴멕시코주 최대 도시이기 때문이다. 내일 이곳을 떠나면 언제 다시 한국식당을 만나게 될 지 기약할 수 없다. 최소한 다음 일주일간은 아닐 것이다. 호텔을 체크인 한 후 한국식당 검색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몇 개의 식당 리스트가 뜨기는 하는데, 뭔가 기대했던 것과 조금 다른 양상이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곳을 선택해서 찾아 간 식당은 ‘Asian Pear’. 가보니 작은 가게이고 덮밥이나 도시락의 형태로 제공된다. 김치찌개 같은 건…. 없다. 그래도 사이드로 김치를 준다니 다행이다 싶다.
문제는 가게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식당에서는 식사가 불가능하고 테이크 아웃만 가능하단다. 어쩔 수 없다. 배도 고픈데다 다시 호텔까지 가다보면 음식도 식을 것 같아서 그냥 차 안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그래도 맛있다. 김치는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서 실망이지만. 어쩌면 다음 김치를 먹기까지 몇 주가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견딜만 하다(고 생각한다).
내일은 쉬는 날이다. 여행 일정을 짜면서 대략 5일 단위로 쉬는 날을 넣어두었다. 정말로 쉴 필요도 있고, 혹시 모를 일정의 변수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예정된 일정대로 진행되어서 내일은 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산타페로 이동해서 푹 쉴 것이다. 푹 쉰다는 건, 인디언 관련 장소 방문이 없다는 얘기다. 내일 블로그도 쉬는가? 그건 아직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