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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2 퀴비라, 코로나도의 꿈이 스러지다

캔자스 리용의 코로나도 퀴비라 뮤지엄

by Jaeho Lee

아침 식사를 하러 호텔 식당에 내려가니 테이블마다 체코 국기가 꽂혀있다. 로비에 있는 Wilson 타운 안내서를 보니 이곳이 캔자스주의 체코 capital이란다. 체코 출신 이민자들이 초기에 대거 정착하면서 체코 커뮤니티가 형성된 듯 하다. 주인장 아주머니가 전통의상을 갖춰 입고 있기에 체코 옷인지 물어보니 그렇단다. 오늘 지역방송국에서 방송 촬영을 오기로 되어 있어 준비 중이란다.


간밤에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우리가 전날에 묵었던 콜로라도주 La Junta 인근에 벤트 요새(Bent’s Fort) 유적지가 있는 것을 모르고 지나쳤다. 윌리엄 벤트(William Bent)가 1833년에 만든 교역소로 이곳에서 인디언, 미국 상인, 멕시코 상인, 백인 수렵꾼, 서부로 떠나는 개척자, 군인 등이 한데 어울려 물건을 교역하고 보급품을 구입하던 곳이다.


해당 건물이 고증에 맞추어 재건되어 있어서, 실제로 가보면 서부개척 시대의 교역소 풍경을 실감나게 느껴볼 수 있었을 것 같다. 이곳도 국립공원 공단에서 관리 중인데, 해당 자료를 보니 스타워즈에 등장하는 여러 외계인들간의 교역소 모습이 이런 곳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20190723_234539.jpg 안내책자에 실린 벤트요새 교역소 재현 유적지 사진

윌리엄 벤트는 교역소를 운영하면서 쉐이엔 및 아라파호 부족들과 친구로 지내고, 쉐이엔 추장의 딸과 결혼도 한다. 백인들의 공세로 이들 부족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의 상황을 이들에게 전달하며 조언을 해주고 통역 및 대리인 역할도 수행하였다. 인디언들과의 평화를 위해 본인이 직접 에반스 주지사와 시빙턴 대령을 만나 평화협정을 맺을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그에게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미군의 샌드크릭 습격 전에 큰 아들은 미군들에게 붙잡혀 인디언 캠프로의 길 안내를 강요 받았고, 나머지 두 아들은 다른 인디언들과 함께 인디언 캠프에 머물고 있었다. 안면이 있던 솔(Soul) 대위의 도움으로 이들은 학살에서 목숨을 건지게 되는데, 이후 백인들의 잔학상에 치를 떨면서 백인인 아버지 윌리암 벤트와의 관계도 단절하고 인디언 부족들과 함께 전사로 참여한다.


참고로 Day 10 Taos Pueblo에서 타오스 부족민들이 미국과 멕시코 전쟁 때 미국이 임명한 뉴멕시코 주지사 Charles Bent를 죽이고 이로 인해 미군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그가 윌리엄 벤트의 형이다.


캔자스주를 운전하면서 느끼는 건데, 도로에 기독교 복음 관련 그리고 낙태 반대 관련 입간판들이 자주 등장한다. 소위 미국 보수주의의 핵심인 복음벨트에 진입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오늘의 행선지는 리용(Lyon)이라는 도시에 위치한 코로나도 퀴비라(Coronado Quivira)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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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코로나도와 퀴비라 얘기를 해야 할 시간이다. Day 5 주니부족편에서 얘기했던 코로나도 탐사대 두번째 이야기이다.


1540년 뉴멕시코 지역 푸에블로 마을에서 원하던 금을 찾지 못한 코로나도에게 새로운 소식이 전해진다. 부하들이 Cicuique라는 푸에블로를 방문했다가 그곳 주민들에게 잡혀있던 인디언 노예 한 명을 데리고 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자신의 고향 마을에는 금을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아 둘 정도라는 것이다.


코로나도는 이 말만으로는 크게 반응하지 않다가 증거도 있다는 그의 말에 급히 관심을 보인다. 이 노예는, 황금팔찌를 가지고 있었는데 Cicuique 푸에블로 인디언들에게 잡히면서 빼앗겼다고 얘기한다. 이 말에 스페인군은 해당 푸에블로인들을 추궁하였지만, 이들은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여 스페인군으로부터 모진 고문(스페인 사냥개에게 물어 뜯김)을 당하게 된다.


이 노예는 푸에블로 인디언들보다 피부가 검고 체격조건이 좋아서 스페인인들에게 투르크인의 모습을 연상시켰고, 엘 투르코(El Turco)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코로나도는 엘 투르코가 퀴비라(Quivira)라고 부르는 그의 고향을 찾아 1541년 4월 말에 푸에블로 인디언 지역을 떠나 동쪽으로 향한다. 떠난 지 열흘이 넘어서부터 코로나도의 부대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환경을 맞이하게 된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그리고 이곳에서 무리 지어 돌아다니는 엄청난 숫자의 괴상하게 생긴 소들(버팔로), 그리고 버팔로 사냥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초원 인디언들이었다.


우리도 뉴멕시코를 떠나 이곳 캔자스에 오기까지 이틀간을 달리면서 끝없는 지평선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던 바로 그 대평원이다. 시야에는 온통 지평선뿐이라 이정표를 할 만한 지형이 전혀 없는 대평원에서 코로나도 부대의 정찰대는 버팔로 똥을 중간 중간에 놓아서 따라오는 부대가 길을 찾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방향을 잡기 위해서는 현지 인디언들의 방식을 사용했는데,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는 곳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화살을 날린 뒤 그곳에 도달하기 전에 또 다시 같은 방향으로 화살을 날림으로써 계속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갈 수 있었다.


출발한 지 한 달쯤 지난 후에 코로나도는 퀴비라의 존재를 알고 있는 원주민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설명하는 퀴비라의 모습은 코로나도가 상상하던 것과는 판이했다. 그곳 주민들의 거처는 돌로 만들어진 다층 주택이 아니라 짚을 엮어 만든 조잡한 것이고, 마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금이 아니라 옥수수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퀴비라의 위치는 동쪽이 아니라 북쪽인데, 앞으로 40일 정도를 더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코로나도는 매우 고통스런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 뉴멕시코에서 가져온 보급품이 바닥이 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엘투르코는 퀴비라가 그리 멀지 않으니 짐을 최소화하여 신속하게 퀴비라로 가자고 제안했었다. 아무리 다그쳐봐도 엘투르코는 자신이 진실만을 얘기했다는 입장을 취하는 상황에서 코로나도는 중대 결정을 한다. 행군 속도를 높이기 위해 보급품과 본대는 뉴멕시코로 돌려보내고 정예 기병 30명만으로 새로 얻은 정보에 기초해 북쪽으로 가기로 한 것이다.


초원에서의 생존은 그 지역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사냥에 의존했다. 그런데 방향을 잡을 지형지물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일부 부대원들이 사냥을 나갔다가 본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에게 방향을 가르쳐주기 위해 총을 쏘고, 나팔을 불고, 북을 치고, 모닥불을 피웠지만 일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끝없는 초원은 망망대해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코로나도와 스페인 원정대의 이런 모습을 보면 경탄스럽다. 차로 80마일의 속도로 달려도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이 초원을, 이들은 걸어서 그리고 말을 타고 수 개월간 행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금이 있다는 마을을 발견하기 위해서. 며칠씩 물 없이 지내는 것도 일반적이었다. 이들이 원주민들에게 보인 잔학상을 생각하면 분노가 생기지만, 이들의 강인함과 불굴의 투지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Tony Horwitz는 이러한 스페인인의 모습에 대해 ‘불굴의 의지와 약간의 광기 사이인 것 같다’고 표현했다.


그 해 여름 이들은 마침내 퀴비라에 도착한다. 출발한 지 77일째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곳은 대평원 원주민들이 얘기한대로 짚으로 만들어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초라한 마을이었다. 그 마을에서 코로나도가 발견했던 유일한 금속은 추장의 목에 걸려있던 구리 조각 하나가 전부였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91120224949_1_crop.jpeg 박물관에 전시된 코로나도의 탐사 경로도

코로나도는 엘투르코를 모질게 심문하고, 그는 마침내 사실을 고백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짓으로 얘기를 지어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Cicuique 푸에블로 주민들이, 자신에게 스페인군을 멀리 동쪽 초원지대로 유인해서 그들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도 했다. 코로나도의 병사들은 엘투르코를 목 졸라 살해한다. 그리고 퀴비라 주위의 마을들을 수색했지만 금으로 된 도시는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퀴비라는 멋진 곳이었다. 마을의 토양은 기름지고 개울과 연못이 있어 물도 풍부했다. 인디언들은 옥수수, 호두, 자두, 포도를 길렀고 오디는 야생으로 풍부했다. 당시 이곳까지 원정 갔던 한 부대원은 자신이 유럽의 국가에서 보았던 어느 곳보다도 이곳이 농사나 목축에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한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코로나도는 농사를 지으러 이 먼 곳까지 진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실망감을 잔뜩 안고 다시 뉴멕시코로 돌아간다.


코로나도의 미국 내륙 진출에서 반환점이 된 퀴비라가 실제로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현재는 이곳 캔자스주 리용 인근인 것으로 얘기가 되고 있다. 이곳 리용에 코로나도와 퀴비라에 관한 박물관이 있는 이유이다. 그 동안 방문했던 중서부지역 미국 오래된 마을들은 대체로 쇠락한 느낌을 주었는데, 리용은 오래된 건물들이 많이 있으면서도 깔끔하게 정돈된 느낌이다. 코로나도 퀴비라 박물관은 마을 도서관과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이전에 방문했던 인디언 보호구역 내 부족 박물관들의 초라함에 비하면 매우 근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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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들어서니 백발의 아주머니가 상세하게 박물관 내용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신다. 인근지역에서 출토된 원시 원주민들의 유물들, 퀴비라에 거주했던 위치타(Wichita) 부족의 주거지 재현물, 인근 지역에서 출토된 코로나도 원정과 관련된 중세 스페인군 장비 유물, 그리고 산타페 트레일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특별전으로 세계의 벽들(Walls) 자료가 준비되어 있고 (만리장성, 베를린 장벽, 그리고 근래의 미국 멕시코 장벽까지), 지하에는 이 지역(Rice County)의1900년대 초반 물품 및 생활상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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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 지역에 거주했던 위치타 부족의 집들이 코로나도의 부대가 묘사했던 것과 같이 짚으로 둥글게 지은 형태였고, 또한 중세 스페인군 장비가 출토되면서 리용이 퀴비라의 위치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코로나도는 다시 뉴멕시코로 돌아와서 지내던 중 말에서 떨어지면서 다른 말의 발굽에 머리를 채이는 부상을 입는다. 당시 뉴멕시코의 스페인인들 사이에서는 멕시코로 돌아가자는 의견과 퀴비라로 다시 가서 그곳을 식민지화 하자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는데, 부상을 입은 코로나도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죽고 싶어하여 1542년 봄에 멕시코로 돌아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탈자가 발생하였고, 2년 전 출정 시 수 천명에 이르렀던 코로나도의 부대는 100명도 채 안 되는 규모로 멕시코로 귀환한다.


그의 귀환 시기는 스페인 왕실에서 식민지 원주민들에 대한 가혹행위를 규제하기 시작하던 시기와 맞물리게 된다. 열렬한 가톨릭 옹호자였던 스페인 왕실은 식민지 개척을 야만인들을 주님의 종으로 만드는 전도, 교화의 수단으로 생각했기에 이들에 대한 불필요한 가혹행위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코로나도 탐사대의 원주민에 대한 행위가 마침 그 시범 케이스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처벌은 면하게 되었지만(부하가 대신 경미한 처벌을 받음) 그가 탐사했던 멕시코 북부 지방에 대한 통치권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44세의 나이로 죽게 된다.

수 천명의 탐사대를 꾸리는 것은 엄청난 투자를 필요로 한다. 코로나도의 탐사에는 당시 멕시코 총독도 투자를 했지만, 코로나도 본인도 전 재산을 걸었다. 중남미의 잉카, 아즈텍 제국 탐사를 통한 엄청난 대박 성공스토리를 지켜보았던 코로나도에게 황금도시 치볼라, 퀴비라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당시 정황적으로 결코 무모하지 않은 투자였다. 1년전에 이미 마르코스 데 니자(Marcos de Niza)가 자신의 두 눈으로 황금으로 반짝이는 치볼라를 봤다고 보고하지 않았던가(Day 5 Zuni편). 퀴비라의 경우에는 미심쩍은 정황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치볼라에서 허탕을 치고 난 상황에서 코로나도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정황적 근거를 가지고 투자를 집행했다는 점에서, 나는 코로나도는 콜럼버스나 데소토(De Soto)보다 훨씬 더 합리적인 사업가였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입수한 정보가 왜곡되었던 것인데, 운이 없었다고나 해야 할까? 콜럼버스의 무모함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잠깐 다룬 적이 있는데, 다음 기회에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데소토는 코로나도와 같은 시기에 플로리다에 상륙해서 미대륙으로 진출한 스페인인인데, 그에 대해서는 미시시피 강을 건너면서 얘기를 시작하는 편이 좋을 듯 하다.


리용을 떠나 남쪽으로 향한다. 행선지는 오클라호마에 위치한 Muskogee이다. 경로를 찾아보니 캔자스의 최대도시인 위치타(Wichita)를 지난다. 코로나도가 퀴비라에서 만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주민 부족의 이름을 지닌 도시이다(참고로 캔자스시티는 캔자스주가 아닌 미주리주에 위치해 있다). 다시 언제 큰 도시를 만날지 모르니 이곳에서 맛난 식사를 하고 가기로 한다.


동양식당을 검색하니 뜻밖에 Gangnam Korean Grill & Bar가 등장한다. 앨버커키에서 그토록 찾고 싶었던 한식당이다. 식당을 찾아가는 길이 이렇게 설렐 수가 없다. 내가 너무 흥분하는 것 같다고 아내가 옆에서 핀잔을 준다. 한식은 포기하면 견딜 수는 있지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 행복한 일이다. 여행 시작 12일만에 삼겹살과 김치찌개로 감동의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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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클라호마로 넘어오면서부터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고속도로 통행료를 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도로의 포장상태는 이전의 다른 주들만 못하다. 왜 그럴까?


내일은 이곳 오클라호마에 있는 체로키(Cherokee)와 촉토(Choctaw)부족을 찾아서 그들의 박물관들을 둘러볼 예정이다. 미국 독립 당시 미국 남동부에는 문명화된 부족(Civilized Tribes)이라 불리는 5개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체로키, 촉토, 크리크, 치카소, 세미뇰 부족이다. 땅 투기꾼 출신 대통령이라 불리는 앤드류 잭슨 대통령에 의해 이들 부족은 모두 오클라호마주로 강제 이주의 설움을 당한다. 내일의 주제이다.


내일 묵을 장소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몇 가지 변수가 생겨서 오늘 밤 향후 일정을 좀 더 다듬어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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