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체로키(Cherokee), 크릭(Creek), 촉토 (Choctaw), 치카소(Chickasaw), 세미뇰 (Seminole)부족으로, 북쪽으로는 노스캐롤라이나, 서쪽으로는 미시시피, 남쪽으로는 플로리다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세력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 부족은 1539년에 플로리다로 상륙하여 북상한 스페인의 데소토(De Soto)원정대를 통해 유럽인을 처음 접했고, 당시 유럽인과의 접촉으로 인한 전염병으로 많은 주민과 부락이 몰락하는 경험을 치른 바 있다. 데소토에 대해서는 향후 방문하는 남부지역에서 얘기할 예정이다.
미국 남동부는 플로리다를 거점으로 북으로 진출하려는 스페인과, 미시시피강 및 루이지애나를 거점으로 동으로 진출하려는 프랑스, 그리고 대서양 연안을 중심으로 남진하려는 영국간에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던 현장이기도 하다. 아직 미대륙의 이주민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고,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신대륙으로 보낼 병력이 부족했던 이들 유럽국가는, 현지에 있던 원주민부족과 동맹을 맺고 이들을 무장시켜 대리전을 치르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유럽 열강들과의 각축 속에서, 이들 부족은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갈등관계에 있는 상대 부족을 제압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유럽 국가들을 활용했고, 이 과정에서 유럽 문물을 다른 지역의 원주민보다 신속하게 받아들였다. 그 결과 1800년대 초반 경에는 부족의 생활방식이나 수준이 당시 백인 이주민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정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 중 가장 앞서 있던 체로키족의 경우, 수 만 마리의 가축을 키우고 흑인 노예를 부리며, 농장을 경영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정치제도도 미국의 체제를 도입하여 헌법, 의회, 대법원이 설립되고, 자체 학교 시스템도 구축한다. 체로키족 학자이자 기술자였던 세쿼이아(Sequoyah)는, 1825년에 자신들의 언어를 쓰고 읽을 수 있는 체로키 문자를 고안하여 부족의 공식 문자로 인정받고, 부족은 체로키 문자로 된 신문까지도 발간한다.
이처럼 일찍 문명화 된 이들을 ‘문명화된 5개 부족(Civilized 5 tribes)’이라고도 부른다. 확장정책을 펴고 있던 미국은 이들의 땅에 계속 눈독을 들이게 되고, 다수의 강압적 조약 체결을 통해 상당량의 땅을 야금야금 양도받는다. 부족들 입장에서는 억울하지만 나머지 영토 보전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이 5개 부족을 송두리째 들어내어 서부의 미개척지대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준비하고, 이는 1830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이 인디언 제거법(Indian Removal Act)에 서명함으로써 실행에 옮겨지게 된다. 인디언 지역(Indian Territory)이라고 명명된 지금의 오클라호마주가 새로운 터전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모순이 없다. 당시 오클라호마 지역에는 코만치, 위치타와 같은 다른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이들과는 어떤 상의도 없었기에 결국 남의 땅을 빼앗아서 교환한 셈이다.
동부에 거주하던 인디언 부족들의 강제이주 경로
이러한 미국의 조치에 대해 5개 부족의 대응은 각각 차이가 있었다. 치카소족과 촉토족은 미시시피강 유역에 이웃해 있던 부족이었는데, 오랜 기간 서로 전쟁도 치르고 (치카소족은 프랑스, 촉토족은 영국이 지원) 관계가 좋지 않은 상태였다. 치카소족은 미국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으면 세력이 더 강한 촉토족 휘하로 편입시키겠다는 미국의 엄포와, 이주정책을 따르는 순서대로 가장 좋은 땅을 골라 갖게 해주겠다는 유혹에, 첫 번째로 미국의 조치를 받아들이고 부족민들은 오클라호마로 떠난다.
크리크족과 세미뇰족의 경우에는 무력 충돌이 발생하고, 군대가 이를 제압하면서 강제 이주가 이루어진다.
촉토족은 군대까지 동원한 미국의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어쩔 수 없이 부족대표들이 반강제적으로 합의를 하고 이주를 하게 되는데, 미국측의 강제 이주 시한에 쫓겨 한겨울에 이주를 진행하면서 1만 3천 명중에 2천 5백명가량이 추위와 콜레라 등으로 사망하게 된다.
체로키족 경우에는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부족대표 존 로스(John Ross)의 지도하에 법적 대응에 나선다. 인디언 제거법을 근거로 체로키부족의 땅을 빼앗으려 하는 조지아주 정부를 미국 대법원에 제소하여 ‘주정부는 인디언부족의 영토에 대해 어떠한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는 판결을 받아낸다(이 대법원 판결은 향후 인디언 보호구역과 관련한 여러 법적 해석에 기준이 되는 매우 중요한 판결이 된다). 그럼에도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을 무시하고, 조지아 주정부는 체로키 부족의 땅을 미국인들에게 매각하는 절차를 진행한다.
일부 체로키인들은 법적 대응으로 맞서는 존 로스의 접근법에 동의하지 않고, 어차피 밀려날 수 밖에 없을 바에야 협상을 통해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을 받아내는 것이 좋다고 주장하며, 1835년에 미국측과 강제 이주 합의문에 서명을 한다(New Echota 조약). 그리고 미국은 이 합의를 근거로 체로키 부족에 대한 강제 이주를 추진한다. 존 로스와 체로키족은 이 조약문에 서명한 주체가 체로키족의 대표성이 없다고 항변하지만, 미국 의회는 단 1표 차이로 해당 조약을 인준해버린다.
이주에 저항하는 체로키 부족은 군대에 의해 강제로 주거지에서 쫓겨나서 수개월간 열악한 수용소 생활을 거친 뒤 오클라호마로 이동을 시작하는데, 이 과정에서 4천명의 주민이 사망한다. 이 강제 이주를 ‘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고 부른다. 이후 체로키족은 오클라호마에서 새롭게 부족체제(Cherokee Nation)를 꾸려나가고, New Echota 조약의 서명에 앞장섰던 일부 체로키인들은 살해 당한다.
숙소를 떠나 Cherokee Nation으로 들어가는데, 기존에 남서부 인디언 보호구역을 들어설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그냥 일반적인 미국 어느 교외지역에 있는 느낌이랄까? 주거지의 모습도 특별한 점이 없다. Civilized tribe였으니 그럴 만 하다. 체로키 문화센터 또한 잘 만들어져 있다. 박물관 내부에는 눈물의 길과 관련한 내용을 그럴 듯한 전시물과 함께 이해가 쉽도록 마련해 두었다. 모든 전시내용은 영어와 체로키 알파벳이 병기되어 있다.
인근에는 17세기 체로키 마을을 복원해 두었는데, 이곳에서는 1시간 가량의 가이드 투어가 진행된다. 10시 30분 투어 시간에 맞추어 나가보니 우리의 가이드가 근사하다! 몸에 군살이라곤 하나도 붙지 않은 구리빛 피부의 미남 청년이다. 게다가 체로키족 전통의상(?)을 걸치고 있다. ‘나달을 닮았네. 일부러 이렇게 잘 생기고 멋진 청년을 뽑았겠지?’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우리의 가이드에 매우 흡족해 하는 눈치다.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양해를 구하니 괜찮단다. 설명 듣는 내내 틈틈이 사진을 찍는다.
기존의 다른 부족 투어와 달리, 이곳은 당시 원주민들의 생활상을 시범과 함께 상세하게 설명해준다. 우리 나라의 민속촌과 같은 느낌이다. 여름과 겨울에 지내는 집은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짓는지, 돌칼과 화살촉은 어떻게 다듬는지, 덕아웃(dug out–통나무를 이용해서 만드는 배)은 어떻게 만드는지 등등. 여기서 새롭게 알게 된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통나무 배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큰 나무를 베어야 하는데, 당시 원주민들에게는 도끼와 같은 도구가 없었다. 돌칼로 작업하기에는 너무 큰 일인데, 이들은 나무 밑둥에 마른 진흙을 붙이고 불을 붙여서 태워 쓰러뜨리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사람이 탈 수 있도록 나무의 속을 파내는 것 또한 불을 붙여서 속 부분을 태우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당시 원주민들은 유럽 상인들과 교역을 했는데, 체로키족의 경우 주 교환수단은 사슴가죽이었다고 한다. 유럽 물품가격은 사슴가죽의 매수로 매겨졌는데, 도끼는 4장, 물컵은 1장, 화승총은 20장과 같은 식이다. 당시 가장 비싼 물품이 화승총이었는데, 장전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관계로 신속성이 생명인 사냥에서의 효용은 활보다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화승총을 몇 자루씩 차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를 오늘날 젊은이들이 비싼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는 것에 비유하는 가이드 말에 사람들이 웃는다.
당시 체로키 여인들은 남편들의 옷을 화려한 원색으로 많이 지어 입혔는데, 이는 혹시라도 외적의 침략을 받을 때, 남자들이 주 표적이 되도록 하여 그 사이 아녀자들은 숨을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기도 하고, 교역소에 갔을 때 좀 더 있어 보임으로써 좋은 대우를 받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활 줄은 짐승들의 내장을 말려 만들었고, 화살 촉은 사냥용과 전투용이 달랐다고 한다. 사냥용은 화살촉이 화살과 함께 쉽게 빠지도록 만들어서 재사용이 가능하도록 한 반면, 전투용은 화살촉이 몸에 박혔을 때 화살을 빼내면 화살대만 빠지고 화살촉은 몸 안에 남아서 잠재적 살상력을 높이도록 했단다. 영화에 보면, 인디언 화살을 맞았을 때, 화살을 앞이 아니라 뒤로 빼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해야 화살촉이 화살과 함께 빠질 수 있다고.
설명 듣는데 집중하느라 멋진 가이드와 나란히 하는 사진을 찍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아내에게 한마디 건넸다. 반응은 해석이 쉽지 않다.
다음엔 촉토 뮤지엄으로 향했다. 체로키 뮤지엄이 접근이 쉬운 대로변에 있었던 것과 달리 이곳을 찾아가는 길은 굽이 굽이 산길이다.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Choctaw Nation Capital이라는 곳은 너무 조용하다. 뮤지엄 주차장도 비어있다.
뮤지엄 내부 구성은 나름 알차다. 수십개의 조약을 통해 이들 부족의 영토가 줄어들게 된 과정, 그리고 강제 이주관련 전시가 있다. 그리고 촉토 코드 토커(Choctaw code talker - 암호병)가 등장한다.
흔히 코드 토커하면 2차 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 해병대 소속 나바호 암호병들을 생각하는데, 그 시조는 바로 촉토족 코드 토커이다. 1차 대전 때 미군의 암호가 독일군에게 해독되자, 당시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촉토족 병사들에게 자신들의 언어로 무전 교신을 하라고 지시하면서 활용이 되었는데, 당시 포로로 잡혔던 독일군이 ‘도대체 그 교신 내용은 무슨 언어냐고’ 궁금해 했다고 한다.
뮤지엄 건물 뒤편 넓은 대지에는 예전 전통 주거지를 복원해 두었다. 하지만 역시 아무도 없다. 체로키족과 촉토족의 같은 듯 다른 뮤지엄에 대해 아내와 얘기를 나누었다. 우선 뭐랄까, 체로키부족의 경우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이 넘쳐나는 듯 하다. 그리고 또 하나, 부동산. 부족 보호구역의 위치가 체로키족은 도시 번화가와 멀지 않은 반면, 촉토족은 구석진 산지 쪽이다. 위치가 멀다 보니 방문객이 덜하고, 그러다 보니 정성과 관심도 덜해지는 것이 아닐까?
박물관 직원(매점 직원을 겸한다)의 말로는, 박물관이 부족 보호구역의 중앙에 위치하다 보니 외부 접근성이 떨어져서, 보호구역 외곽 쪽에 새로운 문화센터와 카지노를 짓고 있는 중이니 앞으로는 좋아질 것이라고 한다.
촉토 뮤지엄을 떠나 오늘 숙소인 아칸소주 파인블러프(Pine Bluff)로 이동하는 길은 내내 숲길이다. 가도 가도 끝이 안보이는 길게 뻗은 길을 다니다가 굽이굽이 차를 운전하려니 더 피곤하다. 이런 길은 많이 익숙한 풍경이라 새로움도 덜하다.
아내가 얘기한다. ‘우리가 지금 평상시 와보기 힘든 콜로라도, 캔자스, 오클라호마, 아칸소를 지나는데, 대표적 도시들인 덴버, 캔자스시티, 오클라호마 시티, 리틀록을 가보지 못하네’. 그렇긴 하다. 인디언 관련지 중심으로 다니다 보니 항상 변두리 지역으로 지나간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각 주의 명소들까지 커버하며 다니려면 이 여정은 지금보다 몇 배 길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마침 아칸소주의 핫스프링즈(Hot Springs)라는 곳을 지나는데 ‘클린턴이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라는 입간판이 서있다. 다행히 명소 하나 지난다.
7월 31일까지 워싱턴 DC에 도착해야 할 일이 생겼다. 간밤에 여정을 대폭 수정했다. 7월 31일까지는 기존에 계획했던 5일에 하루 쉬는 날도 모두 취소하고 강행군이다. 정말 인디언만 보러 다니게 생겼다.
내일은 루이지애나주의 Poverty Point를 거쳐 미시시피강을 넘어 나체즈(Natchez)로 간다. 미시시피강 유역의 원주민 고대문명을 찾아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