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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 11 그들이 쫒겨나고 학살당한 이야기

미국 인디언들의 영토 상실 그리고 샌드크릭(Sand Creek) 학살

by Jaeho Lee

샌드크릭(Sand Creek)을 찾아가는 날이다. 샌드크릭 학살지는 현재 국립공원 공단에서 관리를 맡고 있는데,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park ranger(공원관리인)와 대화 프로그램이 있다. 오후 2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하니 오전에 시간 여유가 있어, 숙소에서 책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디 브라운(Dee Brown)이 1970년에 저술한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이다. 이 책 4장에 샌드크릭에서 학살당한 쉐이엔족과 아라파호족의 얘기가 나온다. 다시 한 번 읽어보아도 가슴이 저리는 이야기이다. 디 브라운의 저서는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여 미국의 서부개척과정에서 인디언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들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기에, 혹시 미국 서부개척시의 인디언 역사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는 추천할만한 책이다.


샌드크릭 진입로에 위치한 마을의 이름이 시빙턴(Chivington)이다. 맘에 들지 않는다. 시빙턴은 학살사건의 책임자 이름인데, 애도하는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그 이름을 해당 장소 앞 마을에 갖다 붙일 수가 있을까? 대화 프로그램 시간에 따져 볼 일이다. 그런데, 아내가 우려한다. ranger가 어떤 사람일지 모르니 너무 심하게 얘기하지는 말라고. 그래도 국립공원 관리 직원인데, 상식수준의 양심은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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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크릭 진입로부터는 비포장도로이다. 차코캐년을 다녀오고 세차를 하며, 이제는 비포장이 없을 줄 알았었는데…. 도로 상태는 차코캐년보다는 나은 듯 하다. 멀리서 Visitor Center가 보이는데 처음엔 그냥 농장 가옥인줄 알았다. 이제껏 다녀본 어느 국립공원 안내소보다 초라하다.


오후 1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는데, 주차장에는 아무도 없다. 차에서 내리니 park ranger가 친절하게 주차장까지 마중 나와 안내를 해 준다. 샌드크릭 학살지가 멀리 건너 보이는 이곳에는 그 사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되어 있는데, 사일러스 솔 대위와 조셉 크레이머 중위의 편지 사본이 전시되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편지 얘기는 나중에 더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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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itor center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까지 오솔길이 나 있어 걸어가 볼까 하고 있는데, 레인저가 한 마디 한다. 길에 뱀을 조심하라고. 아내가 독이 있냐고 물으니 방울뱀은 독이 있지만, 건드리지 않고 그냥 가만두면 별 일 없단다. 아직 뱀에 물린 방문객은 없었다며 그다지 도움되지 않는 위로를 한다.


다행스럽게 전망대 입구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한 비포장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학살지는 쉐이엔과 아라파호 부족의 요청으로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전망대에서만 내려다 볼 수 있는데, 전망대 곳곳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물품이 놓여 있어 더 숙연함을 가져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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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방문객이 우리 외에 몇 팀 더 오긴 했는데, ranger와의 대화시간인 2시에 해당 장소에 도착한 이는 우리 부부뿐이다. ranger와의 private talk 시간이 되었다. Ranger는 40분이라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 갔는지 모를 정도로 실감나게 샌드크릭 관련 얘기를 들려준다. 대단한 story teller이다. 이제 내가 story teller가 되는 시간이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


일단은 간략하게 유럽인들에 의해 인디언들이 어떻게 밀려나게 되었는지를 훑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대서양을 따라 유럽인들의 식민지가 건설되면서 일차적으로는 해안지역의 유럽 식민지 이주민들과 주변의 인디언 부족들과의 갈등 및 충돌이 있었다. 이주민 숫자가 계속 증가하면서 대서양 해안 지역의 인디언들이 우선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프랑스와의 아메리카 식민지 쟁탈전에서 승리한 영국은 1763년에 경계선(proclamation line)을 공포하는데, 애팔래치아 산맥을 중심으로 인디언들과 아메리카 식민지의 경계를 나누고 서로 이 선을 침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는 애팔래치아 동쪽에 살던 인디언들이 서쪽으로 쫓겨나야 함을 의미했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91120212635_2_crop.jpeg 영국이 인디언과 식민지 영토를 나눈 1763 경계선

하지만,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미국이 독립하게 되면서 이주민들이 대거 서쪽으로 진출하자 기존의 1763년 경계선은 무용지물이 된다. 미국 정부는 1795년 그린빌(Greenville) 조약을 통해 인디언들을 미시시피강 서쪽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는데, 백인 이주민들은 오래지 않아 미시시피강 서쪽으로도 진출을 시작한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91120212828_3_crop.jpeg 1795년 그린빌 조약으로 확정된 미국 영토. 그 이전까지 미국이 확보했던 영토는 우측의 분홍색자역이었는데 해당 조약등을 통해 청색선 오른쪽의 초록색 인디언 지역이 미국에게 넘어감

결국 그린빌 조약조차 지켜지지 않게 되고 그후에도 강압적이고 기만적인 수 많은 조약들을 통해 1860년에는 인디언들이 경위 100도선 서쪽으로까지 밀려나게 된다. 제임스 타운(Jamestown)에 영국의 첫 식민지가 세워진 지 250년만에, 그리고 영국이 인디언과 식민지간의 경계선을 애팔래치아 산맥으로 설정한 지 100년만에 인디언들의 영토는 이미 절반으로 줄어든 상황이 되었고, 많은 부족들은 풍요로운 환경의 터전을 빼앗기고 낯선 황야로 밀려나게 되었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91120213533_4_crop.jpeg 1860년경의 미국인 확보 지역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848년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를 양도받고,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됨에 따라 서부로 이주하는 행렬이 줄을 잇게 된다. 이들이 인디언들이 차지하고 있던 대평원 지대를 지나가게 되자, 미국은 이동 경로(산타페 트레일, 오레건 트레일, 캘리포니아 트레일)의 안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미국은 1851년 대평원의 부족들과 Fort Laramie 조약을 맺어 대평원 지역의 인디언 영토를 인정해 주는 대신, 이 지역의 통행 안전권을 보장받게 된다. 이 지역에 철도와 전신주를 설치하는 대가로 연금 지급 또한 약속되었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91120213727_5_crop.jpeg 대평원을 지나는 역마차 트레일과 서부 인디언들과의 전투지역

그런데 1850년대 후반 콜로라도 지역에서도 금광이 발견된다. 대규모 이민자들이 (10만명 이상) 콜로라도로 몰려들어 도시를 설립하게 되고, 콜로라도 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있던 쉐이엔족과 아라파호족과의 간헐적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1851년 조약을 뒤집고 이들에게 새로운 조약의 체결을 강요하게 되는데, 이것이 1861년 Fort Wise조약이다.


이 조약의 핵심은 백인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거나 향후 필요로 하는 땅들을 이들 부족의 영토에서 제외하는 것인데, 이를 따를 경우 부족의 영토는 기존 조약으로 보장되었던 것보다 12분의 1로 줄어들게 된다. 대부분의 부족민들은 이에 반발하였으나, 미국의 막강한 힘을 파악하고 있던 쉐이엔족의 대추장 검은주전자(Black Kettle) 등은 부족민 보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당 조약에 서명을 하게 된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91120214218_6_crop.jpeg 라라미조약으로 보장 받았던 영토가 와이즈조약으로 대폭 줄어들게 됨

곧 이어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서부지역 질서유지 책임을 맡고있던 미군의 관심사가 동부 전선에 쏠리는 상황에서, 콜로라도에서 이주민들과 인디언간의 충돌이 격화된다.


1864년 여름 콜로라도 주지사 존 에반스(John Evans)는 인디언들을 몰아낼 목적으로, 콜로라도주에서의 인디언 위협에 대해 워싱턴에 과장해서 보고하고, 별도의 부대 창설을 승인 받는다. 또한 포고령을 발표하여 미국에 우호적인 인디언들은 적대적인 인디언들과 떨어져서 미군의 리용(Lyon) 요새로 출두할 것을 명령하고, 이에 응하지 않거나 지정된 거주지역을 이탈하는 인디언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여 콜로라도 주민은 누구든 이들을 사살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미군의 공격을 우려한 검은주전자 등 추장들은 9월에 부족 주거지 인근 리용 요새의 지휘관 윈쿱(Wynkoop) 소령을 만나, 자신들은 미국에 우호적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상호 평화를 약속할 것을 요청한다. 윈쿱 소령은 이들의 진정성을 믿으나 자신은 그럴 권한이 없다며 이들을 데리고 콜로라도 주지사가 있는 덴버로 간다. 하지만, 주지사는 이미 콜로라도에서 인디언을 몰아내기로 마음먹은 상황이었기에 이들과의 회담을 무성의하게 마치고 평화협상은 군인들과 하라고 떠넘긴다.


회담 당시 검은주전자가 발언한 내용(이 글의 끝에 일부 소개)을 보면, 백인의 공세 앞에서 어떻게든 부족민들을 보호하고 싶은 그의 애절한 심정이 느껴지는 한편, 이미 이들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에반스의 무성의함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궁금하신 분들은 앞서 소개한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를 읽어보시길.


주지사와의 회담에서 확실한 답을 받지 못한 이들 부족은 자신들의 사냥터를 포기하고 리용 요새 인근의 샌드크릭에 천막을 치고 미군측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거주지 이탈 금지 명령으로 사냥도 제대로 나가지 못해 리용 요새의 보급품에 의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1864년 11월 29일 존 시빙턴 대령이 지휘하는 600-700명의 기병대가 새벽을 틈타 이들 인디언 캠프를 공격한다.


미군을 본 한 추장은 자신들이 고대하던 평화에 대한 답을 가지고 오는 줄 알고 마중 나갔다가 피살되었고(미군이 공격해오는 것임을 알아차리고는 전투의지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두 팔을 팔짱 끼고 있는 채로 총에 맞음), 검은주전자는 Fort Wise조약 체결 당시 미군측으로부터 선물 받았던 성조기와 백기를 텐트에 높이 걸어 자신들이 미국에 우호적임을 알리려 했다.(당시 미국측은 검은주전자에게 성조기를 걸고 있으면 이는 미국과의 우호의 상징으로 어느 미국인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었음) 그럼에도 미군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사격을 해댔다.


미군의 공격이 있기 얼마 전 리용요새에 새로 부임한 지휘관 스캇 앤소니 소령은 이들 부족에게 거주지를 나가서 들소 사냥을 해도 좋다고 얘기했기에 공격 당일 젊은 인디언 전사들은 모두 버팔로 사냥을 나가 있었다. 샌드크릭에는 미군의 보호를 믿고 있던 쉐이엔과 아라파호 부족의 아녀자들과 추장들이 남아있었고 이들은 무차별적인 학살을 당하게 되는데 희생자의 수는 230명을 넘는다.


샌드크릭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족민들은 추운 겨울에 헐벗고 굶주리고 부상당한 채로 50마일 떨어진 젊은 전사들의 사냥터로 도망치고, 자신들의 가족이 비참하게 살해당했음을 알게 된 전사들은 땅을 치고 통곡하며 복수의 칼을 갈게 된다.


해당 부대를 지휘했던 시빙턴 대령은 학살을 마치고 덴버로 돌아와서 수천의 인디언을 물리쳤다고 거짓보고를 하고 시내에서는 환영 퍼레이드까지 열린다.


하지만 이 참상은, 당시 학살 가담 명령을 거부했던 사일러스 솔 대위와 조셉 크레이머 중위의 편지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이후 정부 조사단은 해당 사건이 학살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들의 편지 내용을 읽고 있자면, 당시 미군(엄밀히 말하면 민병대)의 잔학상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살려달라고 무릎 꿇고 애원하던 여인들, 임산부, 어린아이들을 가리지 않고 죽였고, 그에 그치지 않고 시신에 대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잔학행위를 자행했다.

com.daumkakao.android.brunchapp_20191120214550_7_crop.jpeg 학살 유적지에 전시되어 있는 솔 대위의 고발편지

전투가 아닌 무자비한 학살극으로 밝혀졌지만 시빙턴 대령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군 당국의 조사가 시작되자 그는 군복을 벗음으로써 군사 법정의 피소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민간법정에서는 군에서의 일이라는 이유로 피소되지 않았다. 반면,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의회에서 증언까지 했던 솔 대위는 덴버에서 암살당하고 마는데, 그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고 한다.


얘기를 흥미 있게 듣던 아내가 한 마디 한다. ‘시빙턴이 죽였겠지.’ 그랬을 수도 있겠다. 솔 대위의 폭로가 있기 전까지 시빙턴은 수천의 인디언을 무찌른 영웅으로 워싱턴에 가서 준장 승진 심사를 받고 있었는데, 모두 무산되고 군복까지 벗게 되었으니. 하지만, 미국은 백인들의 땅이고, 그 외의 인간들을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고 공공연히 외치고 다녔던 콜로라도 주지사 시빙턴, 그리고 그의 연설에 환호했던 많은 인간들 모두 용의자일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보다 우리 편만 잘 살면 된다는 극단적 집단 이기주의자가 권력을 잡고 주민들을 선동할 경우,그 집단 광기가 우리의 인간성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또 다시 힘있는 자들의 세계에서 반복될까 걱정한다. 왜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것일까?


가이드와의 대화시간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동쪽으로 달린다. 숙소까지는 4시간(250마일)을 더 달려야 한다. 점심을 아직 먹지 못했기에 가장 처음 만나는 프랜차이즈 식당에 들어 가기로 했는데, 첫 맥도날드를 발견하는데 2시간 30분이 걸렸다. 미국 땅에서 맥도날드가 이렇게 귀하기는 처음이다. 험한 곳 데리고 다니면서 밥 때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아내에게 미안한 맘이 크다.


오늘 숙소는 캔자스주의 Wilson이라는 마을에 위치한 Midland Railroad Hotel이다. 1899년에 건축되었던 건물을 리노베이션 해서 호텔로 사용하고 있다. 구석구석 오래된 느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어 일반 호텔에서의 투숙 경험과는 사뭇 다르다. 다만, 이곳 Wilson은 너무 작은 마을이라 마땅히 저녁 먹을 만한 곳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비상식량을 하나 꺼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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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캔자스주 리용(Lyon)에 있는 Quivira Museum을 방문한 뒤, 오클라호마의 Muskogee라는 곳으로 이동한다. Day 5에 주니부족 방문 시, 1520년 뉴멕시코 지역으로 진출한 스페인 탐사대장 코로나도를 언급한 바 있다. 그가 뉴멕시코 지역에서 원하던 금을 찾지 못한 뒤, 더 내륙 쪽으로 가면 금이 가득한 마을이 있다는 제보를 듣고 향한 곳이 바로 Quivira이다.


한가지 더. 샌드크릭 학살지 앞의 마을 이름 시빙턴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그 마을 이름의 부적절성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주민들이 그런 이름을 붙인 것 자체도 역사의 하나이기에 이를 그대로 역사로 기억하기로 했다고. 어쨌거나 한 때 번성했다던 시빙턴은 오늘날 마을이라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쇠락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불편한 맘은 좀 덜하다.


아래는 덴버에서 열린 회담에서 에반스 주지사에게 검은주전자가 한 말의 일부이다

‘당신의 회람을 봤소. 나는 그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서로 상의하러 왔소. 윈쿱소령도 당신을 만나볼 것을 권했소. 우리는 얼마 안 되는 기병대 뒤를 따라 눈을 감고 불 속을 지나 오듯 예까지 온 거요. 그건 오로지 백인과의 평화를 바라서요. 당신의 손을 잡고 싶소. 당신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는 구름 낀 길을 걸어왔소. 전쟁이 시작된 이래 하늘엔 항상 어두운 구름이 끼어 있었소. 여기 나와 함께 있는 용사들은 모두 내 말을 따를 사람들이오. 우리는 부족민이 기뻐할 좋은 소식을 가져가고 싶소. 부족민들이 잠이라도 편하게 잘 수 있게 말이오. 우리 인디언들은 무엇보다도 평화를 바라고 또 지켜왔으므로 당신이 여기 있는 군인 추장(장교)들에게 우리를 적으로 여기지 않도록 일러주길 바라오.
나는 당신과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하러 이곳에 왔지, 늑대가죽을 쓰고 오지 않았소. 인디언들은 들소가 있는 곳에서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 굶어 죽소. 우리가 이곳으로 올 때는 아무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당신을 만나러 왔소. 내가 돌아가 부족민들에게 당신과 여기 덴버에 있는 모든 군인 추장의 손을 잡고 왔다고 말하면 그들은 물론 평원의 모든 인디언족도 함께 먹고 마시고 난 뒤에 흡족한 마음을 가지게 될 거요.’


하지만, 당시 에반스는 인디언의 위협을 과장해서 워싱턴에 보고하고 추가 부대 편성까지 확보해 둔 상황이라, 본인의 위상 추락을 우려하여 인디언과의 평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이들을 덴버로 데려온 윈쿱소령을 문책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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