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항상 낭만을 간직하면서 살아왔다. 동경이 내 밤하늘에 맺힌 별이라면, 낭만은 내가 디디고 있는 대륙 그 자체였다. 영원한 건 없기에, 항상 깨지고 부서지면서 육지의 이곳저곳을 채워갔고 그렇게 반가운 세상이 열렸다.
어릴 적에는 오히려 운명론을 믿지 않았다. 삶은 스스로가 개척해 나가는 것이고, 절대 수동적일 수 없다고 믿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인간인데, 어떻게 운명이 정해질 수 있다 말인가. 그런데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모든 사건이 정해진 딱딱한 운명이 아닌, 한 사람의 전체적인 틀을 잡아주는 젤리 같은 운명이라고. 얼마 전 땅바닥에 강하게 튀긴 내 모습처럼, 반탄력을 가지는 순간과 사건의 양끝에는 뜻이 통하는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나는 특정한 환경 속에서 누구보다 자립심이 강하게 자라왔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한테 설명을 하든, '와, 정말 그럴 수밖에 없겠어요.' 하는 대답이 나올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완벽한 혼자를 꿈꿨다. 그리고 나는 이 자립심에 항상 울었고, 괴로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발목을 채운 거대하고 차가운 쇠사슬처럼, 나에게 지워지지 않을 흉터를 남겼다. 그래서 끊어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혼자가 가지는 나만의 완벽을 위해서 말이다. 갈망으로 가득 채운 해방인 만큼, 이 원초적인 시련도 그만큼 몸집이 거대했다.
그러면서 배려를 바탕으로 삼은 개인주의와, 선함과 아름다움의 가치를 깨닫고 내 낭만으로 삼았다. 괴롭고 어두워질수록 더 밝은 빛을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세상에 흐린 빛이 내리는 빈도가 심해지고, 깊어질수록 더욱 의연하게 낭만을 지키려고 했다. 나도 생각의 수렁에서 익사할 정도로 깊어봤고, 숨 막혀 봤으니.
당연하게도, 완벽한 혼자는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사회와 공간은 내게 존재한 적이 없었다. 얼마 전의 허무함은, 많이 지쳤던 거겠지.
그래서 이제는 떠난다. 다가오는 수요일에 환상이 담겨있는 서울로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최소 한 달은 생각의 굴레를 놓고 떠나고 싶지만, 그러면 진정으로 돌아오기 싫을 것 같아서. 현실적으로 낭만과 극적인 타협을 이루어냈다.
일시적으로 동경과 닮은 모습을 가진다는 건, 스스로에 대한 시험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속으로만 품어온 것들이 실제로 현실이 됐을 때,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형으로 성립된다. 그러나 글로 적을 뿐, 실제로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도통 걱정이 하나도 되지 않아서. 시물레이션조차 필요 없는 일이기에.
무형의 것을 생각으로 세운 지 어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처음 행동으로 선보일 차례인데, 너무나도 기대가 된다. 튀어 오르는 그 극적인 느낌을 오롯이 흡수하고 오기를 바란다. 항상 눈부신 우주는 펼쳐져 있었으니, 내가 날아오르기만 하면 된다. 지금의 현실에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