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서울여행 #4
푸짐한 것도 좋지만, 정갈한 게 더 마음에 든다. 그렇게 깔끔한 셋째 날의 아침식사를, 이튿날과 동일한 메뉴로 마치고 아늑한 곳을 나섰다. 어젯밤 겨우서야 떼어 놓았던 쓸쓸함은, 꽤 진했기에 아직까지 문밖에 쌓여있었다. 따사로운 햇살도 전부 지우기에는 무리였나 보다. 간곡한 눈빛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래, 같이 가자. 너도 나의 온전한 일부이니까.
오늘의 첫 발걸음은, 파인다이닝이었다. 수많은 미디어에서 비추는 물질적 허영이, 아직까지도 남들 앞에서 말하기엔 부끄럽다. 그것들 중 정말로 내가 원하는 감성과 낭만이 있는데도, 주위의 시선에 많은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꽤나 떳떳해졌다. 나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선에서 다니는 거니까. 무엇보다 겨우 마주한 고요에 내가 고개를 돌릴 수는 없는 거니까.
평소 요리를 즐겨하는 편이었다. 잘하는 건 아니고, 그냥 혼자서 깨작깨작. 적잖이 만족하고 먹을 수 있는 정도이다. 그래서 요리 경연 프로그램은 퍽이나 흥미롭게 봤던 기억이 있다. '마셰코'나, 가장 최근의 '흑백요리사' 같은. 그래서 서울 여행을 계획하면서,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분들의 가게에 꼭 한 번 방문해보고 싶었다.
많은 분들이 계셨지만, 아쉽게도 일찍 탈락해 궁금했던. 이북 요리를 하시는 최지형 셰프의 '리북방'의 예약에 성공했다. 짜릿했다. 그 어느 때의 수강신청과 티켓팅 같달까. 웃음이 무럭무럭 자랐다.
이북 요리에 근간을 두고, 한식을 위주로 하는 파인다이닝이었다. 리뷰를 살펴보니 메인 요리로는 순대가 나오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들었다. 평소 순대를 즐겨 먹었기에, 발걸음에 더욱 힘이 실렸다.
마포구 한적한 거리에 숨어있는 리북방에 당도했다. 방문 전 유의사항에 대해서는 두세 번 숙지했으니, 거침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랐다.
바 테이블이었기에, 입장해서 예약 정보를 확인하고 입구에 가까운 위치에 안내를 받았다. 방 안에 가득 퍼진 향이, 너무나도 독특했다. 시골의 할머니집도, 산 깊숙한 곳의 사찰도 아닌 것이. 고급진 향냄새라고 할까.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그러나 코가 맵지는 않았다. 오히려 빨리 적응되고 따스함을 건네주는, 그런 향이었다.
고목으로 이루어진 테이블에 오픈 키친이었다. 그리고 한가운데 솟아있는 가마솥은 이북 식당이라는 정감을 강하게 주었다. 혼자 와서가 아니라, 이런 곳이 처음인 시골 촌뜨기라서 많이 쭈뼛댔던 것 같다. 한두 분씩 착석을 마치고, 서비스 시작 전 직원분의 간단한 설명이 따랐다. 다들 어느 정도 시끌벅적하다가 설명이 시작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져 경청하는 분위기였다.
설명이 끝나고 음료 주문을 받았다. 평일 런치는 술이 아닌 음료가 필수였는데, 나는 술을 시켰다. 한가로운 평일의 낮술이라니. 대책 없고 경쾌하지 않은가? 고민을 하다가 헤네시 VSOP 한 잔을 시켰다. 브랜디 계열을 마셔본 적이 없었고, 특히 코냑은 더욱 그랬다. 거기서 가장 유명한 격인 헤네시에 호기심이 걸렸다.
코냑 잔을 받고,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입맛을 돋우기 위한 샐러드부터 시작했는데, 난 그때부터 동공이 커졌다. 맛있다의 개념을 조금 상회하는 맛이었다. 아 이래서, '미식'이라는 어휘가 있는 거구나. 지금껏 먹어본 한식 중 가장 맛있었다.
설명과 함께 접시를 반납할수록 행복해졌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자연스레 다짐이 되었다. 이만한 가격으로 이러한 음식들을 즐길 수 있다고? 더욱 물질적이게 되면서, 바라는 동경을 뒤쫓았다.
그나저나, 곁들이는 코냑은 왜 이렇게 마음에 드는지. 위스키보다 너그러운 맵싹함에, 달달함과 감칠맛은 더 풍부하니. 딱 내 스타일이었다. 복귀해서 코냑에 대해 공부하겠다 마음먹었다. 그리고 꼭 한 병 장만해야겠다고.
어느덧 양 볼까지 올라온 몸 안의 뜨거움이, 마지막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에 녹기 시작했다. 아쉬움이 남았다. 생각보다 배가 많이 불렀지만, 너무나도 아쉬웠다. 배 터질수록 먹을 수 있는데. 특히 중간의 버섯국수와 솥밥은 더더욱. 깜짝 놀라고, 황홀한 기분이었는데.
세상이 밝았다. 술기운에 떠오른 만족감은 밝은 만큼 차올랐다. 생전의 외식 중 단연 가장 맛있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만큼 경험이 적은 것일 수 있다. 그래도 시골뜨기는 이 정도에도 눈이 커지는, 그래도 행복했던 개구리니까 말이다.
스쳐간 생각은 진심이었다. 더욱 철저하게 나의 것을 다듬자고. 저기 밤하늘에 펼쳐진 동경들에, 더 화려한 옷들을 입혀보자고. 어느 누군가를 만나도, 진솔하게 다가갈 수 있는 나 자신이 되자고. 낭만 가득히 품고 살자.
주정뱅이의 끄덕임을 달고서는, 다음 예정지로 향했다. 거기 어디던가. 아 맞다, 매봉역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