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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훈 작가 Feb 19. 2022

문득 환멸감이 찾아올 때

생각 노트 #10

 이상할 것 없는 잔잔한 일상에서 환멸감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평일과 휴일, 종종 생기는 약속 등 변한 것이 없는 나의 생활이었지만 슬며시 다가온 듯했다. 이토록 짙은 환멸감은 처음인 것 같았다. 때때로 회의적인 기분이 들면 성격 자체를 죽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불과 최근까지의 내 모습에 등 돌릴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이질적인 두통은 시작되었다.




 '오늘따라 조금 예민한가?'


 점심시간, 메신저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평소처럼 주고받는 장난이 민감하게 느껴졌다. 괜히 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아서 불편한 감이 생겼다. 당장이라도 욱한 마음에 불편한 것들에 대해 절실히 표출하고 싶었다. 그렇게 키패드를 두드리던 와중에 손가락이 멈췄다. 아직까지는 이성에게 버려지진 않았나 보다. 확실히 평소보다 날카로웠다. 무슨 일이지, 왜 이럴까. 본인이 느끼면서도 이유를 정확히 짚어낼 수 없어 곤혹스러웠다.




 머리를 양손으로 붙잡고는 당장 급한 생각을 잠재우려고 했다. 지속적으로 느껴왔던 특정 지인의 갑을 관계를 형성하는 일 때문일까. 아니면 며칠 전 친한 친구에게서 느낀 섭섭함일까. 또는 어제의 고독한 기분이 문제였나. 혹시, 이 모든 것들이 원인 제공자일까. 한 번 타오른 불덩이는 꺼질 줄 몰랐다. 머리는 차갑고 가슴은 뜨거워야 한다던데, 교차하는 생각과 만감에 머리는 뜨겁고 가슴은 그간 말끔히 간직하려고 했던 인간관계에 대한 실망으로 차가운 얼음장처럼 변했다.


 무언가를 어떤 이에게 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손을 내밀어 받는 것보다 주는 행위에 상대적으로 큰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나도 해당하며, 대개 자존감이 낮은 이들일 것이다. 원체 자존감이 낮고 쓸데없는 감수성만 뛰어났던 나는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모든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내가 만들어냈고 스스로를 찌른 깨진 칼날들을 고이 간직했다. 상대방은 그런 생각조차 없었으며 의도 또한 불확실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가진 절망스러운 관계적 특징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었다. 날붙이를 품고 있는 품에는 항상 피가 흘렀다. 쓰라리고 고달팠지만 무덤덤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의 자존감 또는 감수성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내딛는 날이면 무뎌진 흉터를 뚫고 속살을 난도질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죄 없는 가슴을 두드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눈물이 찔끔 나도 참았다. 권투에서 혼자 하는 연습을 쉐도우 복싱이라고 하던데, 이것은 나라는 사람의 향상을 위한 연습이 아닌 자해 행위에 가까웠다. 한스럽고 저주하는 내 성격과 좁은 그릇의 되풀이되는 말로였다.



 

 이번엔 성격 안에서의 연극을 끝내 버리려고 했다. 한 번도 버리지 못한 붉은 철조각들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는 곧 바스락 소리가 들리며 밟아댔다. 울화에 휩싸였지만 조용하게, 그러나 멈출 줄 몰랐다. 그렇게 대부분의 것들이 철가루가 되었을 때 나는 털썩 주저앉으며 드디어 엉엉 울어댈 수 있었다. 그간 많이 참았었나 보다. 정말로.


 나를 미워한 적은 없었다. 이렇게 태어났고 자라온 성격을 저주하지는 못했다. 나를 부정하면 지금까지 참아온 모든 것들에 꼬리표처럼 달아놓은 각자의 해명들의 존재가치가 사라지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만들어낸 칼날이 실제로 생겨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허상은 실존 가능성에 대비를 위한 명목이라며 무참히 나를 찔러댔었다. 상대방에게 자그마한 가시라도 찔리게 하기 싫었다. 이게 소중한 사람들을 위하는 길이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온전하게 나만을 생각하고 싶었다.




 이렇게 개인주의가 확고해지고 내 태도에도 일상적인 친절은 사라지는 걸까. 그래, 내가 해왔던 모든 것들을 부정하자. 이들에게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닌 나를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남이 바라보는 행복을 같이 달리면 나의 행복감도 채워질 줄 알았다. 깊은 구덩이를 파고 들어간 나의 자존감에 스스로 바라는 행복은 사치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지상으로 향하는 밧줄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라보는 행복은 뜨겁게 타오르는 태양일 텐데, 나는 태양의 형상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구덩이 안에서 한 줄기 햇빛으로 온전한 모양을 그려냈던 나는 모순덩어리에 가까웠다. 부적응자로 탈바꿈하지 않을까 진심 담긴 걱정이 어렸다.


 어두운 빛이 만연한 구덩이 속에서 한 발자국씩 투박한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체불명한 이가 내려준 동아줄이 언제 끊어질지 모르지만 당장 올라갈 수 있다는 상황에 만족할 따름이다. 사실, 구덩이의 높이조차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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