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고작 3할 풍경 속의 글과 글
공감도 0%의 영화, 스크린을 잡지 못해 싸늘한 극장, 내게만 남아있는 네 권의 작은 책과, 심연 깊은 곳에 움츠러든 10년이란 세월. 하지만 광활한 풍경보다 발밑에서 시작하는 길. 눈물이 되어버린 발자국의 기억들.
새벽같이 나와 조금 다른 길을 걸으니 못보던 붕어빵이 보였다.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애초 혼자일 수 밖에 없는 마음으로 십 수년을 살았는데, 트위터 한 구석에 ‘이건 나의 3할밖에 되지 않아’라는 쓸쓸한 문장이 적혀있다. 길을 잃은 이른 아침은 왜인지 편안하고, 3할도 되지 않을 자리에서 쓰던 글에 마침표를 찍었다. 우연이 필연이 되어버리는 질곡의 우울. 아마도 얼마 전 나는 한 자 차이 이 단어에서 셀 수도 없이 작은 기적의 문장을 적었다. 아침녘 트위터의 문장은 나라 요시토모 말. 슬프고 멋진 사람이 걸어간다.
박항서의 대한민국에 관하여_꿈을 그리고, 꿈을 바라보고, 꿈을 함께 걸어가는 것. 촌스런 애국심이라 해도 반일에 입을 모으는 지금의 어떤 영화보다, 내겐 이게 더 대한민국이다. '공작'과 '말모이'의 차이, '친일'과 '반일'의 기울어져버린 저울, 하지만 한 자 차이.
일본 게이 잡지 바디가 휴간했다. 마츠코 데락스를 배출한 이 잡지를 사본 적은 몇 번 없지만 신주쿠 2쵸메는 내게 이 잡지의 표지가 뒤덮인 창과 창의 풍경이기도 했다. 이로 일본에 남는 게이 잡지는 '삼손'이 유일. 25년의 사요나라, 겨울의 이별. 내겐 고작 이 교정지 한 장이 남아있는 휴간의 조각이지만, 휴간은 슬프게도 안녕을 얘기하지 못하는 폐간의 다른 말이다. 겨울 바람을 뒤로하고 애절한 자국을 지우자고 애를 쓰며 걸었다.
산산조각난 하루.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생각일 때 세상의 분열을 느낀다고 누군가가 썼는데, 돌이켜보면 내 삶은 그 말 조차 내뱉지 못하는 외톨이 행성이었은는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그라데이션의 향수를 찾아 헤매는 미아같은 행성.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은 잃어버린 게절 속의 행성.
여섯 시에 눈을 떴다. 며칠 묵은 대니쉬와 네스카페 블랙 커피를 가져와 책상 위에 두어도 아침은 아직이다. 어둠에서 빛이 나고 빛에서 어둠이 흐르는 스다 마사키는 언제봐도 맘을 설레게 하지만, 작은 방에 숨어 간신히 품을 열어보이는 마츠자카 토오리를 말하는 그의 왁자지껄은 겨울 밤의 찬 바람같았다. 스다 마사키가 아닌 이케마츠 소스케, 둘은 몇 해 전 카고시마에서 다가온 영화 속 강둑의 풍경이었지만, 나는 스다.com보다 토오리.com에 메일을 보내고 싶다. 아사노 타다노부가 그려 올린 그림 한장에 다향히 마음을 놓고, 둘이 걷는 거리에도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날은 있다. 길은 발밑에서 시작하는 것. 미래는 그렇게 수줍은 용기같은 것. ‘콜보이’가 되어버린 마츠자카 토오리의 영화를 다시 한번 보고싶다.
지난 여름 도쿄에서 한 시간 반 짜리 면접을 보고 긴자를, 다이칸야마를, 시부야를 걷고 걷다 들어간 타워레코드에서의 우타다 히카루. 아니메 굳즈를 사기 위한 긴 행렬 틈새 유독 여기가 아닌 듯 들려왔던 ‘初恋.’ 책을 두 권 선물받았지만, 다섯 권 받은 듯한 기분이 들고, 회사에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설 선물같은 과자 봉투를 받아들고 집에 돌아왔다. 불안한 잡념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던 지난 여름과 무엇 하나 해결된 거 없으면서 마음이 왜인지 편안했던 오늘의 낙원동.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의 음악은 가끔 나를 그 날 이전으로 돌려주고, 10년이 조금 덜 된 시간의 지금을 생각하며 다행이라 감사하고 다시 만나 미안하다. 후카다 쿄코가 어른답지 않은 어른으로 나오는 드라마 ‘처음 사랑을 시작한 날에 읽는 이야기’는 지난 나와 마주하는 유치하고 만화같은 이야기, 나는 그의 학생으로 나오는 요코하마 류세이에 그저 웃음이 나온다. 실패한 어른이 그리는 아름다운 내일의 이야기. 내일은 정말 할 일이 많다.
밤을 깊이 바라보는 것, 오래 바라보는 것, 뿌연 풍경을 오래 지켜보면 보이는 것들. 그냥 그런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