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계절, 백 투더 퓨쳐의 13월
지난 3월, 교통비가 0원을 찍었다. 출퇴근은 하지 않아도 이래저래 광역 버스를 자주 타는 생활인데 메일로 도착한 카드 명세서엔 교통비 0원이란 숫자가 적혀있었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사회적 거리를 두면서도 나름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다 생각했지만, 돌연 들이닥친 0이란 숫자에 새삼 나의 한달, 아니 마지막 회사를 나온 이후의 일상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교통비 0원의 명세서를 받는 이의 일상. 그 초라함이 너무 내 것인 것 같아 마음이 시렸다. 세상엔 누군가의 인기척으로 알아차리는 계절이 있다고, 집에서 생활한 게 5년을 향해감에도 그제야 나의 '오늘'을 알아버린 것만 같았다. '교통비 0원의 일상', 나른한 에세이 서점 코너에 꽂혀있으면 나름 어울릴 것도 같지만, 그런 이야기는 사실 꽤 버거운 생활의 무게를 숨기고 있다. 코로나, 그 멈춰버린 시간은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에 하나의 이름을 가져다 주었다. '어차피 나갈 일도 없는데', 올 초에 무심코 내뱉었던 혼잣말이 뒤늦게 사무치는 저녁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의 아마도 백 열 두번 째 날. '요노스케 이야기'라는 영화를 보았다. 일본에선 2013년, 국내에선 2017년 여름 개봉했던 영화인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5년이 훌쩍 지나 리모콘을 만지작거리다 이 영화의 재생 버튼을 눌러버렸다. 영화야 매주 목요일, 아니면 금요일 신작이 극장에 걸리고, 때로는 보지 못한 신작을 올레 TV같은 걸로 뒤늦게 보기도 하지만, 별다른 이유도 없이, 동기나 목적같은 건 더욱더 없이 굳이 꺼내보게 되는 영화가 이곳엔 왜인지 있다. 영화 시장이랄지, 산업의 논리랄지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이 오롯이 나와 영화 사이에서 완성되는 '만남'들. 나이를 먹어서인지, 혹은 그저 코로나 자숙 기간 때문인지 별 거 아닌 사소함에도 '의미'를 느껴버리는 나, 그런 시절이다. '요노스케 이야기'의 원제는 '요코미치 요노스케(横道世之介).' 풀어보면 '요코미치(横道)'는 샛길이고, '요노스케(世之介)'는 세상만사같이 있으나 마나한 말이기도 한데, 영화는 대학에 입학하며 상경한 남자, 요코미치 요노스케가 살아가는 십 수년을 그린다. 갑작스런 '멈춤'의 계절 한복판에서, 나는 이 영화가 시기적절, 그야말로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이 영화에서 제목은 사실 조금 트릭이다. 주인공 남자의 이름을 그대로 영화 제목으로 가져온 만큼 그의 일상이 처음부터 끝까지 흘러가지만, 실제 보이기 시작하는 건 그가 아닌, 그를 스쳐가는 주변 인물, 잇페이, 카토, 치하루, 쇼코...그러니까 샛길로서의 시간들이다. 요노스케는 그의 엄마 말대로 평범해도 너무나 평범해 웃음이 나는 사람이고, 입학, 졸업, 취업, 결혼과 같이 정해진 메인 도로가 아닌 사소함도 지나치치 못하는 '샛길'의 시간을 살아간다. 일종의 선함, 혹은 성실함으로 누구와도 다른 도쿄에서의 일상을 걸어간다.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에 1초도 고민없이 허락하고, 좋아하는 여자의 심술궂은 말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그렇게 잇페이, 카토, 치하루, 쇼코가 살아가는 시간의 배경이 되어준다. 우리가 놓치고 온 모든 것들, 지나쳐온 수많은 샛길들이 요코미치 요노스케의 삶 속에서 묘하게 드러난다. 참고로 이 영화는 2001년 일본 JR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구하다 목숨을 잃은 두 명의 희생자 중 일본인 사진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 시종일관 짧은 플래쉬백으로 어제를 반추하는 영화의 리듬이 새삼 이 시대의 일상, 그런 애절함처럼 느껴졌다.
코로나의 직격탄(출퇴근, 밥벌이에 끼치는 악영향을 의미한다면)을 맞지 않은 사람이라 그런지, 정체 불명의 바이러스가 내게 가져다 준 새로운 풍경은 빈 자리를 돌아보는 듯한 조금은 여백을 품은 일상이었다. 많은 이들에게 장애가 됐을 게 분명한 '사회적 거리 두기'랄지, 뉴스에서 떠들던 '잠시 멈춤'이란 말들은 어쩌다 도시가 지금 우리에게 내민 시적인, 앞이 아닌 뒤, 내일이 아닌 어제, '지금'을 명상하는 시간처럼도 느껴졌다. TV를 틀면 뉴스 한 구석에선 이동이 줄어 하늘이 맑아졌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거리를 두는 일상에 욕심은 뒤로 물러나고, 내일이 아닌 어제를 바라보는 시간에 나만 보던 매일은 주위를 둘러보는 날들로 변모한다. 내가 아는 도쿄의 한 온라인 서점 주인은 이 와중에 오프라인 책방을 오픈하게 된 얄궂음에 대해 "어딘가 어제로 플래쉬백하는 기분이 있어요"라고도 말했는데, 우리는 지금 그런 복습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스쳐갔던 무수한 샛길들, 무심코 지나쳤던 타인의 사정들, 포기하고 돌아섰던 길목의 나를, 나는 이 흉흉한 계절 속에 마주한다. 오랜만에 찾은 극장에선 첸카이거의 '패왕별휘'가 20분이 불어나 171분 확장판이 상영되고 있었고, 그 20분의 어제, 잊고있던 그만큼의 내가 지금 다시 시작하고 있다. 봄만 되면, 여름만 가면,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올 초의 나는 기약없는 내일에 조바심만 냈는데, 사실 세상은 지금 우리가 몰랐던 나머지 한 달, 13월의 하루를 보여주고 있는지 모른다. 코로나는 별로 그럴 맘이 없었겠지만, 나는 어쩌면 '나'를 살아가는 계절을 만났다. 13월의 아침엔 또 한 번의 벚꽃이 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