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같이 늘어나는 확진자 수에, 성난 바이러스와 함께 사는 건 흉흉하지만, 와중에 무언지 모를 안도감을 느끼던 순간이 있다. 나에겐 사회적 거리 두기랄지, 잠시 멈춤이란 말이 그랬는데, 이제야 사람을 바라보기 시작한 도시의 오늘같아 조금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누군가는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이건 어떨까. 평소 잘 쓰지도 않던 이쑤시개를 활용해 접촉을 피하는 아이디어랄지, 극장에서 한 칸씩 띄어 앉으며 생겨난 전에 없던 안락함이랄지, 만날 수 없지만 자꾸만 해쉬태그를 달고 만나고 싶어하는 너와 나랄지. 엘레베이터 입구에 적힌 '마스크 착용 필수'란 말은 여전히 좀 살벌하지만, 식당 테이블 구석에 쳐박혀있던 손가락 두 마디만한 나무 조각에서 끌어낸 '쓸모'는, 우리가 몰랐던, 하지만 갖고있던 하나의 '대안'이기도 했다.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어쨌든 하나의 가능성. 3밀을 피해야만 하는 시대, 우린 어쩌면 삽질일지 모를 '시도'를 멈추지 않고, 요즘 일본에선 왜인지 자동판매기가 수선하다. 또 하나의 작고 사소한 일이지만, 사실 나사 하나 없으면 웬만한 조립품은 시작도 하지 못했다. 세상은 가끔 그렇게 흐른다.
시부야 주택가 주차장에 설치된 '브루보틀 커피' 자판기
지난 8월 도쿄 시부야에선 '블루 보틀 커피'의 자판기가 등장했다. '블루 보틀'이라면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해 커피의 '3rd Wave'를 이끌고 있는, 아마 가장 힙하다는 커피 체인 브랜드인데, 고작 자판기 기계 안에 '입점'을 했다. 도쿄, 홍콩을 지나 2년 전 서울 성수동에 오픈을 했고, 그 첫날 길게 늘어선 줄, 연이어 보도되던 뉴스들을 돌아보면 세상 참 살고 볼 일이다. '블루 보틀' 자판기 커피는 자판기지만 5백엔 짜리 동전 하나로 살 수가 없고(가장 싼 가격의 커피가 640엔), 지갑에 충분한 동전이 들어있지 않다면 지폐를 깨야한다. 일본에서 가장 작은 단위의 지폐는 1천엔, 한국 돈으로 1만원 조금인데, 자판기 주제에 사는 사람 손 떨리게 한다. 물론 이는 일종의 '자판기 문화'가 탄탄한 일본이기에 가능한 그림이기도 하다. 일본엔 전국 200만 개 자동판매기가 있고, 그 중 70만 개를 소유하고 이는 코카콜라 재팬의 경우, 자판기에서의 판매가 편의점, 슈퍼, 드럭스토어 등을 제치고 매년 가장 큰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2017년 현재 27%). 더불어 코카콜라 재팬은 코로나 이후 3% 줄기는 했지만 AI 기능이 탑재된 700대를 포함 새로운 입지에 자판기 설치를 더 추가하는 전략을 택했다. 코카콜라 재팬의 카린 드라간 대표는 "자판기가 진화할 여지는 아직 남아있다"고 이야기한다. '아직 남아있는 진화의 여지.' 왜인지 얼마 전 우리가 이쑤시개에서 '간이 접촉'의 기능을 꺼내던 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은, 이상한 데자뷔의 확신이 든다.
도쿄에 자판기를 볼 때면 어딘가 오랜 추억을 걷는 기분이 드는 건, 아마 그곳에 도시의 세월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블루 보틀' 자판기가 태어난 배경을 이야기하면, 자판기 운영사인 '미츠이 부동산 리테일'의 아이덴티티가 있다. 자판기가 설치된 건 시부야이지만 비교적 한적한 주택가의 주창장 구석이고, 그 주차장을 '미츠이 부동산'이 소유하고 있다. '미츠이 부동산'의 마케팅 담당자는 "우리는 주차장을 단지 차를 세워두는 공간이 아닌 잉여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바라본다. 시부야에 '블루 보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좀 더 편하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짜투리 공간의 활용. 그러고보면 목을 축이고 싶은데 가게는 보이지 않고 그렇게 곤란했던 상황은 심심찮게 있었고, 자판기는 그럴 때 가장 저비용으로 목마른 사람의 갈증을 풀어줄 유효한 방법일지 모른다. 접촉을 대신해줄 이쑤시게가 하나 있다면 더욱더. 그에 더해 또 하나의 음료 기업 50년 역사의 '다이도 드링크'는 손이 아닌 발을 사용해 작동하는, 버튼 발밑에 기다란 바 형태를 장착한 '하양식 자판기'를 코로나 이후 선보였고, 무엇보다 '안심'이 중요한 가치가 되어버린 지금, 패키지의 앞면이 아닌 뒷면(칼로리와 영양 성분 등이 기재된)을 전면에 내세워 '믿을 수 있는 자판기'를 시즈오카 역에 기간 한정 설치하기도 했다. "제품에 뭐가 들어있는지 알고싶다는 고객들의 이야기가 많았어요." 마텡팀 당당자는 이렇게 말한다. 자판기, 자동판매기는 이곳에서 한물간 시절의 유산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일본에서 그건 어김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도시의 자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코로나 시절 함께 분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점점 멀어지고만 있는 조금 먼 어제의 기억. 코야마 씨는 내게 무당(無糖)과 미당(微糖)의 캔커피 두 개를 건네주었다.
지난 9월 코로나가 쳐들어오기 이전 도쿄의 외각 밭길을 '달린' 적이 있다. 이상하게 도쿄에서 유럽 야채를 재배하는 남자의 트럭 조수석이었는데, 뜨문뜨문 이어지던 대화 중 그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커피 드시나요?' 뭐 이런 질문이 있나 싶어 의아하기만 했는데, 그는 조금 지나 차를 길가에 세우고 내려 자판기에서 캔커피 두 개를 사가지고 왔다. "하나는 지금 드시고 나머지 하나는 나중에 드세요." 농부가 손님을 맞이하는 방식인걸까. 밭을 갈구며 사는 삶에서의 대화인걸까. 별 다른 무엇도 챙겨가지 않은 나는 그가 싸준 야채 무더기가 미안해 멍하기만 했는데, 동시에 내가 모르던 누군가의 일상을 만난 느낌에 괜시리 기분이 좋았다. 사실은 캔커피 하나도 한 번에 마시지 못하면서...
캔커피, 거리에 무심코 서있는 자판기엔 흘러온 세월, 일상의 역사가 있다. 흘러가고 잊혀지고 묻혀진다는 건 분명 언젠가 우리가 함께했던, 곁에 있던 일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지금, 어쩌면 그곳에 답 아닌 답이 있을지 모른다. 일본에선 최근 동일본 JR(관동 지방의 철도 사업회사)이 'every pass'란 이름의 자판기 정기 결제 서비스를 시작했다고도 하는데, 자판기는 늘 그곳에 한 자리에 멈춰서있는 것 같지만, 그건 항상 내가 살아가는 일상 어딘가의 길목이기도 했다. 월 1만원(980엔)이면 5종의 음료를 매일같이 마실 수 있는 '일상'이라... 그 정도의 '지속가능성'을 자판기는 이야기한다.
* 글 중 등장하는 야채를 재배하는 농부는 인사이트 여행 에세이 '도쿄의 시간 기록자들'에 소개되는, 도쿄에서 유럽 애채를 수확하는 80년대생 농부, 컬러풀 야채 코야마 농원'의 코야마 미사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