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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재경 Jul 01. 2024

글쓰자.

글을 쓰는 이유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

계란


4년전 쯤인가. 당시에 사귀었던 여자친구는 건축학과로, 어딘가 굉장히 예술적인 데가 있었다.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의 인스타 피드는 대체적으로 이상한 오브제들과 길거리에 버려진 담배꽁초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그가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나도 샌프란시스코의 길을 걷다가 버스정류장 의자에 <Poverty in America>라는 책 한권이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었는데, 순간 이거 어딘가 미국 사회의 노숙자 문제에 대해서 평론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인스타에 올린 적이 있다. 사실 그 사진은 무의미하다고 표현하는 것 조차 귀찮을 만큼 가치가 없었다. 그날 밤 스토리에 올린 나의 사진을 빠르게 지우며 생각했다. 진실된 눈을 가진 사람,  순수한 욕구로 창작을 하는 사람들만 예술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아무래도 나는 그런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이야기를 당시 그에게 해주었었다. 그는 나에게 하는 위로랍시고 본인이 생각하는 세상의 두가지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첫번째는 생산자이고, 두번째는 소비자라는 것이다. 이를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본다면, 본인은 생산자에 가깝고, 나는 소비자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각자는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기에, 소비자로서 나의 역할도 정말 중요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로맨틱한 사람이었고, 나는 그의 이론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도 중요한 사람이구나! 그러면 사회가 나에게 부여한 소비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어떻게 훌륭한 소비자가 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했다. 사실 그 방법론은 잘 몰랐지만, 당시 내가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예술의 매개체 중에 글이 가장 익숙했으니, 무작정 책을 많이 읽으면 무언가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 말을 들은 이후 코로나가 터지고,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여자친구와는 헤어지게 되었다. 책은 계속 읽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필립 로스, 돈 디릴로 등의 작가들이 기억이 난다. 미국에서 친했던 친구가 본인이 감명 깊게 읽었다며 오스카 와일드의 <De Profundis>를 나에게 보내준 적이 있다. 그것은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애를 했다는 이유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을 당시, 그를 배신한 자신의 배우자에게 쓰는 러브레터였다. 내가 1800년대 후반 영국의 감옥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새벽 3시 상황실에서 말뚝으로 근무하며 몰래 읽고 있자니 그의 억울함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해가 뜰 시간일 즈음에 슬그머니 기어나와 담배를 피우며 하늘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어딘가 타오르는 오렌지색 같은 햇빛을 바라보고, 그런 클리셰적인 표현을 생각하고 있는 내 자신을 의식하게 된 순간 문득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전포대장님이 재경이 어디있냐고 찾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 호다닥 상황실로 뛰어돌아갔다. 전포대장님 잘 지내시는지.


 

2)


신전


어제는 을지로에 있는 참프루라는 바에 갔다. 조합이 꽤나 이상했는데, 나의 중학교 동창과 대학교 동창, 그리고 거기다가 중학교 동창이 대학원 같이 다니는 형이 근처에 있다고 합류를 권했다. 원래는 남자 넷이니 대충 근처 만선호프나 갈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차로 있던 진달래라는 곳에서 나와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갑자기 옆건물 3층에서 한국 전통음악과 성당에서 나올법한 찬송가를 적당히 섞은 듯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서 철물 작업 비슷한 무언가를 하고 계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창문 너머 어렴풋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갑자기 독립영화 한편을 찍고 있거나 보고 있거나 둘 중 하나는 하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느낌상 만선호프 가면 분명히 이동진이 2점 줄 것 같은 뻔한 내러티브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니까 특별하고 싶어서 참프루에 갔다.


참프루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앙에 바텐더 분들 두분이 계시고, 그 주위로 원형으로 바테이블이 형성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바텐더의 무대를 보러가는 것이다. 남성 한 분, 여성 한 분이 계셨는데, 우연찮게 그분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여성분이 세이수미라는 밴드의 티셔츠를 입고 계셨는데, 최근에 세이수미의 공연에 다녀오신 것 같았다. 내가 그 밴드를 잘 모른다고 말하자 화들짝 놀라시면서 바에서 베스트 오브 세이수미를 틀어주시기 시작하셨다. 처음으로 나오는 노래가 <So Tender>였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아 제목을 여쭤보니 <알고있지만,>의 OST로 쓰였던 노래라고 하셨다. <알고있지만,>은 내가 군대에서 상병장 시절에 흥행하던 드라마였는데, 당시 동기들 전부가 나에게 흡연을 권했지만 괜히 오기가 생겨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던 나에게 담배를 피게 만든 드라마였다. 극중 미대생인 한소희가 담배를 자연스레 피우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였던 것이다. 이 말을 바텐더 분들에게 해드렸는데, 내가 딱 그 말을 한것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만 웃어주셨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택시비를 아끼기 위해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려 걸어가면서 세이수미의 <But I Like You>를 들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육교를 건널 때 즈음에, 문득 바에서 바텐더 분이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을 좋아한다고 하셔서, 나도 그 감독을 사랑한다며 <카메라 펄슨>이라는 영화 꼭 보라고 위풍당당하게 세번 이야기한게 생각이 났다. 그리고 기타 전주가 나올 때쯤 사실 <카메라 펄슨>은 다큐멘터리이고 감독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생각이 났고, 키에슬로스프스키 감독이 만든 영화는 <카메라 버프>였다는 것이 생각났다. 이를 깨달은 순간 육교에서 뛰어내릴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 오해를 어떻게든 풀고 싶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게 어젯밤이다.



3)

뜨똘


최근에 김뜻돌 콘서트에 다녀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섯 X 김뜻돌 콘서트였는데, 다섯 팬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나는 김뜻돌을 보러 갔다. 혼자 가보는 콘서트가 처음이어서 걱정이 되었지만, 안갔으면 어쨌으려나 싶을 정도로 너무 좋았다. 초반 20분은 정말 LSD를 하면 이런 기분일까? 라는 상상을 하게 만들 정도로 무의식의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 들었고, 나머지 한시간은 내가 말로만 전해듣던 슈게이즈 (좋은 의미에서) 공연을 보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행복했다.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으면서도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지금 이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나을까 핸드폰을 내리고 감상하는 것이 나을까 사이에서 고민만 수만번 했다. 공연이 끝난 이후 퇴근길 배웅까지 해보았고, 김뜻돌이 담배 한갑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무슨 담배를 피는지 어떻게든 알아보려 했지만 끝내 알지 못했다. 검정치마는 팔리아멘트 폈던거 같은데. 어쨌든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뜻돌 노래만 주구장창 들었다. 그와 관련된 인터뷰들은 모조리 찾아보고, 검정치마 콘서트 간 이후에도 사본 적이 없던 LP도 구매했다.


그렇게 집에 와서 김뜻돌이 혹시 내가 올린 스토리 공유 안해주나, 라는 허황된 기대감을 안고 인스타에 들어가 보았는데, 공유는 안해주었지만 그와 별개로 김뜻돌이 블로그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2018년부터 쓰여진 글들도 있었는데, 문체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밤을 새워 글을 읽어내려갔다. 글을 정말 잘쓴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글을 쓸 때 지향하는 스타일 자체가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것이기에, 나의 글이 마음에 들어도 그것을 모두에게 공개하는 것에 대해서 항상 거부감이 있었다. 김뜻돌은 팔로워 수가 나와 비교했을 때 천배는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들과 행동들을 부끄럼 없이 톡톡 튀는 문체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듯했다. 문득 4년전 여자친구가 나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고, 과연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차이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바라본 김뜻돌은 록스타이지만, 그도 다른 음악가들과 소설가들의 작품을 소비하는 소비자였다. <Psychomania>는 알고보니 자신이 좋아하는 서양의 밴드들을 오마쥬한 노래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뜻돌의 노래 <다섯 번째 봄>은 사실 그와 그의 남자친구의 5주년을 기념하는 노래였고, 어찌 보면 연인관계를 소비함을 통해 생산해낸 노래라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생산자와 소비자의 명확한 차이가 있다기 보다는, 생산하는 행위와 소비하는 행위가 있는 것 같다. 너가 생산한 것을 내가 소비하는 것. 그리고 너가 소비하기 위해 내가 생산하는 것.


나는 지금까지 너무 많이 소비만 해와서 배부르다. 책도 미친 듯이 읽었고, 영화를 보는 데에도 몇천 시간은 소비한 것 같다. 김뜻돌 노래만 해도 솔직히 이번주만 10시간은 들었다. 이제는 생산을 좀 해보려고 한다.



4)

친구 @bbaekcloud의 글


문득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글을 쓰는 것을 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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