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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재경 Jul 03. 2024

청춘이다.

그래, 청춘인 것이다.


요새 청춘이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나 이제 만 스물네살인데, 그래서 사실 스물여섯인데, 그렇지만 솔직히 아직 청춘인건 맞는데, 청춘이라는 말을 고등학교 때부터 거의 10년째 해오고 있다. 언제 청춘 끝나는 건지 싶다. 20년 지나도 술먹고 청춘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려나? 그저께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어딘가 살짝 피곤한 것 같아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새벽 한시였다. 막차는 이미 물건너갔고, 그때 나는 을지로에 있었기에 분당까지 가려면 택시타고 가도 한시간은 걸리는 거리였다. 다음날 아침에 깨서 우리집 강아지 산책시킬 생각을 하니 벌써 숙취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러자 술집에서 잔나비의 <작전명 청-춘!>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내 생각의 빛깔이 밝은 푸른색으로 바뀌며 아 맞다, 청춘이다, 이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말을 뱉었고, 재경이 또 술먹고 이상한 소리 하나보다 하는 표정을 띤 나의 친구들은 사실 그들도 스물여섯살이기에 나의 마음에 무의식적이라도 공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오늘 밤은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나와 친구들은 종로의 포차거리를 향해 걸었고, 길에서는 뿌연 담배연기와 함께 나의 택시비 할증에 대한 걱정도 날려버렸다.


종로의 포차거리에 도착했을 때에는 거의 새벽 두시였다. 종로는 청춘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어딘가 젊음 그 자체라기보다는 젊음에 절어져 있는 느낌이 강했다. 겉절이보다는 김치찜같은 느낌? 그니까 대부분 술집에는 남녀가 1:1, 2:2, 3:2, 3:4, 5:5 등의 비율로 앉아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는데, 우리는 서로를 둘러보고 우리 패거리의 남녀비율이 4:0이라는 것을 인식한 뒤에는 조용히 구석에 있는 술집의 테라스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우리는 청춘이기는 한데 슬슬 건강을 신경 써야하는 청춘이라는 생각에 참이슬말고 새로를 시켰다. 한 청춘은 근처 편의점에 가서 숙취해소제를 사왔는데, 알약이 아니라 젤리 형태로 사왔다고 욕을 먹었다. 여기 테라스에 앉을까? 라고 넌지시 권유하는 친구의 말에 나는 순간 피식, 이게 테라스인가? 하고 파리에선 말야—라고 파리의 테라스 컬처가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한 친구가 너 파리 언제 살았는데? 라고 물어봐서 사실 지난 5월에 처음으로 여행 다녀왔다고 고백했다. 파리 3박4일로 다녀오기는 했는데 그래도 잠을 거의 안자서 꽉찬 4일이었다고, 사실상 5일이라고 보면 된다고 주장했다. 사대주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내가 프랑스인이 아님을 안타까워하며 술을 먹다가 아침 일곱시에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니 오전 여덟시였는데, 들어가는 길에 출근하는 아빠와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니 아빠가 피식 웃으며 청춘이네—하는데 나는 택시비를 아빠 카드로 긁었다는 사실이 떠올라서 빠르게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렇죠, 청춘입니다.




그렇다, 청춘이다. 아빠는 청춘이 아닌가? 아빠도 삼십년전에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혼내시지 않았을까. 나는 20대가 되고 대학에 가고 나서야 엄마와 아빠의 연애 이야기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엄마는 아빠가 특이해서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술자리에서 뜬금없이 이상한 말을 하는데, 다들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할 때 본인도 처음에는 이사람 왜이러는지 이해가 안가긴 했는데 집에 와서 두번 생각해보니 그렇게 이상한 말 하는 아빠가 어딘가 매력적으로 느껴졌다고 했다. 이 점은 내가 아빠를 닮은 것 같긴 하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 그걸 매력적이라고 해주는 사람은 만나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빠는 아마 엄마가 그냥 이뻐서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아빠는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한결같이 이상한 만큼 그러한 뻔한 로맨틱한 이야기는 입에 쉽게 담지 않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밖에 잘 나가지 않는 편이다. 아마 나, 엄마, 아빠, 그리고 동생을 생각해보면 내가 그나마 밖에 많이 싸돌아다니는 편인데, 이마저도 주변 또래들과 비교해보면 정말 밖에 많이 안나간다. 그런 우리가 유일하게 다같이 밖에 나갈 때는 아침에 또또 산책할 때다. 우리집 강아지인데, 사랑을 얼마나 많이 받는지 걸어가다가 본인이 더워서 주저앉으면 엄마는 또또에게 우쭈쭈하며 벌떡 안아서 끌고온 유모차에 올려준다. 유모차는 컨버터블 마냥 후드가 올라갔다가 내려갔다 하는데, 자외선 받지 말라고 후드를 내려주면 지나가는 행인이 아기가 있는 줄 알고 말을 걸었다가 흰 털이 잔뜩 나 있는 또또를 보고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한번은 벤치에 앉아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셔서 유모차에서 편하게 엎드려있는 또또를 보시더니 강아지는 강아지처럼 강하게 키워야지, 라고 한마디를 하시자 엄마가 어차피 평생 독립시키지도 않을 텐데 뭐하러 강하게 키워요, 라고 맞받아쳤는데, 할아버지가 머쓱해하며 웃으시더니 맞는 말이긴 하네, 하고 가던 길 가셨다. 그때 엄마가 멋있게 느껴졌다. 사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뭔가 알아듣은 듯이 혀내밀며 웃고 있는 또또가 얄미워서 별 말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뭔가 맞는 말 같았다. 그러게, 인간은 독립을 해야하지만 또또는 독립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또또는 평생 청춘일수도. 또또는 아마 아빠 카드로 택시비를 긁어도 될 것이다. 청춘은 돈이 필요하다.


또또는 나와 아침산책 가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어느 정도냐면 아침 여덟시반쯤 되면 알람시계 마냥 나를 깨우러 온다. 신기한 것이 또또는 절대 사람에게는 짖지 않는데, 그 대신 문을 열어달라는 의사표현을 할 때 문 밑에 있는 조그만 틈 사이로 콧김을 계속해서 분다. 그것만으로도 본인의 의사가 표시되지 않는 것 같으면 문에 자신의 몸을 부딪혀 쾅쾅소리를 낸다. 은은하게 크레셴도되는 또또의 콧김소리가 마치 아이폰 알람소리와도 같아서 전날 새벽에 들어와도 항상 여덟시반에는 기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굳이 나와 아침산책을 가려 하는 이유는 운중동 쪽으로 향하는 산책길에 이스트파크라는 카페가 있는데, 애견동반인 데다가 무료로 멍푸치노까지 제공해줘서 또또에게 나와의 산책은 너무나도 행복한 하나의 소풍같은 일인 것이다. 커피값이 비싸니 엄마는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만 데려가서 이스트파크에 가는지 여부가 약 칠분의 일 정도로 상당히 불확실한데, 마음이 약한 나와 가면 칠분의 칠 확률로 그의 요구에 불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또는 영악하다. 청춘은 영악한 것이다. 사실 뭔소린지 잘 모르겠다.


한번은 그렇게 아침산책을 엄마와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이스트파크 앞에서 또또를 안고 밖에 있는 테라스 자리 (젠장, 또 파리잖아) 에 앉아 햇빛을 잘 받은 운중동의 단독주택들을 보고 있자니 어딘가 부르주아의 삶을 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자본주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기분에 걸맞게 사천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 말고 칠천원짜리 에티오피아 드립커피를 시켰다. 박상호 바리스타였던가, 유튜브에서 인플루언서 중 한명이 드립커피를 일상 속의 작은 사치라고 했는데, 엄마는 그런 사치마저 아까운건지 아니면 가계를 위한 희생인건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아마 둘다일 테지만, 내가 알바인가! 나는 청춘이기에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엄마와 나란히 앉아 가만히 있었는데, 문득 엄마가 나에게 담배의 백해무익함에 대해서 강론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엄마에게 내가 담배를 핀다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 이거 분명히 엄마가 나 몰래 내 인스타를 봤거나 영상을 봐서 파악하고 내가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해 충청도식으로 돌려 충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리 충청도의 피가 흐른다고 해도 서울에서 태어났기에 돌려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엄마가 담배와 심장병의 관계성에 대하여 이야기할 즈음에 딱 자르고,


엄마, 나 그렇게 많이 피지는 않아요—


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적이 조금 흐르더니 엄마가 담배의 나쁜 점에 대한 강론을 멈추고 본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엄마가 문학회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본인이 써온 글을 참석한 선배들과 후배들에게 읽어주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문학회가 끝날 때만 되면 술자리에서 담배를 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두번 펴보니 너무 몸과 맞지 않아서 스트레스 받더라도 참고 그냥 글이나 썼다는 것. 그렇게 말을 하고 하늘을 응시하시더니 어딘가 엄마도 감상에 젖은 것 같았다. 엄마는 서른 이전에 결혼했다. 엄마는 계속해서 글을 쓰지 못했다. 엄마는 합격한 문학대학원을 계속해서 다니는 대신 중퇴 후 국어교사를 직업으로 삼는 것으로 시대와 합의를 보았고, 나는 그런 엄마와 서른 이전에는 담배를 끊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또또는 여전히 유모차에 앉아 활짝 웃고 있었다. 또또는 합의를 보지 않는다.




청춘은 잘 채워지지 않는다. 꿈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그저께 대학교 동창들과 있는 술자리에서 문득 내가 ADHD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걸 말하자 주변에 심한 ADHD를 앓고 있는 지인이 있는 친구가 나는 절대 그럴리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보니 나는 ADHD가 있다기 보다는 내면에 있는 어떠한 공허함을 항상 채우려 계속해서 다른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세상 어딘가에 진실이라던가 근본적인 무언가라던가 나의 이러한 공허함에 대한 답변이 있을 것만 같고 항상 무언가를 찾으려 하는데 내가 찾으려 하는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 찾는 과정이 인생이라고 하기에는 인생 너무 빨리 끝나는 것 같다. 어제도 글을 쓰려 책상에 앉았는데 시청역 앞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아홉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두들 30-50대 사이 남자들이었는데, 도보를 태연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이 사실 우리 아빠랑 크게 다를 것이 없어서 심장이 저려왔다. 씨씨티비 영상을 찾아보니 그들도 인생이 그렇게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이라는 것이 너무 분하고 그들의 청춘이 계획한대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 화가 난다. 삶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 크고 나의 성격은 너무 급하다. 나보다 더 큰 무언가에 나를 맡겨버리고 떠내려가버리고 싶다. 아무래도 떠내려가고 싶어서 맨날 술먹으면 친구들한테 한강공원 가자고 하는것 같다.


2년 전쯤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전역한 해였는데, 몇년 만에 해외로 출국하기 정확히 사흘 정도 전에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가족분들이 다들 할머니가 내가 작별인사를 할 수 있도록 최대한 맞춰서 돌아가신 것 같다고 농담 섞어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게 슬펐다. 할머니는 나를 사랑하셨다. 어제는 사촌누나를 만났는데, 누나는 할머니가 항상 조그마한 폴더폰을 열어 나의 사진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를 하며 장난으로 할머니, 손주들 중에 누가 제일 이뻐요? 라고 물어보면 치매가 오셨던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누나를 가리키다가도 두번 생각하시면서 아니야 미국에 있는 걔, 걔가 제일 이뻐, 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해주었다. 어렸을 적에 나는 부모님이 맞벌이인 탓에 할머니와 삼촌이 나를 키우셨는데, 사실 너무 어려서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루는 할머니가 나를 교양있게 키우겠다고 업고 문화센터에 가는 길에 삼촌이 찍어주셨던, 이제는 빛바랜 2000년대 초반의 옛날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나의 옛날 사진들을 보며 할머니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알았지만 할머니가 떠오르지 않았다. 누나는 나의 학창시절, 할머니는 매주 나를 찾는데 미국에 있는 나는 할머니를 찾는 것 같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면서도 가슴이 아팠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십대때나 이십대때나 거의 항상 미국에 있었는데, 한국에 방문하는 여름이면 누나처럼 할머니에게 매주 전화를 드리기보다는 그 십분이 아까워서 친구들과 한강에서 술을 먹으며 놀고 있었고 친구들과 청춘이 얼마 짧은지 인생은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에 대해 논했다. 할머니는 2022년 8월에 돌아가셨고 나는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렇다, 청춘은 이론적인 것이고 이기적인 것이다.


할머니의 장례식 때, 나는 나름 할머니의 손자라는 책임감을 느꼈기에 오시는 분들께 최선을 다해 인사를 드리려 했던 기억이 난다. 거기에서는 나를 알아보며 뭐야, 벌써 이렇게 컸어? 라고 이야기하시며 어깨를 어딘가 따스하게 툭 치시고 가는 분들이 계셨는데, 대부분 엄마 아빠와 함께 대학교 시절 문학회 활동을 같이 했던 분들이었다.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것이 말도 안된다며, 원래 우리 동아리 내에서는 오빠 누나 같은 호칭을 말도 안되고 죄다 형 언니라고 부르는게 원칙이었는데 둘이 결혼을 했다니 이게 무슨 일이냐면서 꺄르르 웃으시는데 왜인지 모르게 나도 몽글몽글해지며 이미 스물네살인데 엄마 아빠의 학창시절인 구십년대의 스물네살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렇지, 그때는 괜히 나처럼 겉멋들어서 위스키 같은거 마시려고 하지도 않고 인당 소주 네병씩은 기본이었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가 이제는 모두 책임져야 할 가족이 생기고 아마 예전보다는 잔잔해졌을 아저씨들과 아줌마들에게 형 잘 지냈어? 누구는 어떻게 지낸대, 등과 같이 반가운 말을 서로에게 넌지시 하는 것을 보니 나도 할머니의 장례식이었지만 배시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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