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비행기에서 든 생각
1) 흐름
그저께 대학교 동창들과 한국을 뜨기 전 마지막으로 술을 먹고 노래방에 갔다. 후배 중 한명이 자신은 도곡역과 매봉역 사이에 살아서 택시타도 괜찮다고 했다. 갑자기 프라이머리의 <3호선 매봉역>이 부르고 싶어졌다. 나 말고는 그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내가 거기에서 나이가 제일 많으니까 그냥 불렀다. 훅이 나오고 빈지노가 흘러, 흘러가, 시간은 흘러가 라고 소리치자 그래, 진짜 시간은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어 짜릿하고 우울했다.
집에 오는 길에 흐르는 것이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가 한남대교를 건너는데 한강은 나의 옆구리를 향해 수직으로 흐르고 있었다. 수직으로 흐른다는 것은 어떤 메타포일까. 이게 맞는 말이긴 하나? 무언가 있을 것 같았지만 나는 취해서인지 수직이란 단어만 떠오르지 적절한 비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 대신 졸업하던 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던 길이 떠올랐다. 우리 대학교 앞에는 조그마한 강이 하나 흐르는데, 나는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조깅하는 것을 좋아했다. 내리막길이라 그렇게 뛰는 것이 멍을 때리기 좋았다. 졸업하던 날 기숙사를 정리하고 공항으로 가려 택시를 불렀다. 차에 탑승하여 창밖을 바라보니 내가 항상 뛰던 강변의 산책로가 보였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강이 흐르는 방향의 반대였다. 흐름의 반대로 가고 있는 나의 모습은 확실히 하나의 메타포 같았다. 내가 흐름 반대로 헤엄치고 있나? 흐름은 뭐지. 이렇게 보고 있으니 흐름이라는 단어가 너무 못생겨 보인다. 아무튼 시간은 흘러가고 흘러가는 것의 반대방향으로 헤엄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시간의 정방향으로 헤엄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싶다.
2) 변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 나도 변했다. 오늘 아침에 또또랑 산책을 다녀왔는데 문득 또또가 늙어간다고 느꼈다. 예전에는 동네에 좋아하는 리트리버를 보면 미친듯이 달려갔었는데 오늘은 뛰는게 귀찮은지 그냥 짖었다. 너가 오라고 하는 것 같았다. 늙은 걸까 반가움이 덜해진 걸까. 강아지도 변한다. 또또가 1년 뒤에는 어떻게 변할지 무섭다.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께 사당역에 갔을 때 파스텔시티에 있는 영풍문고에 들렸다. 나이도 있는데 돈 아껴써야지 생각을 하고 있는 요즘이지만, 2024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 칠천칠백원이라는 것을 보고 구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이제 브런치에 글쓰니까 젊은 작가인 것이다.
비행기에서 책을 펼치고 처음 읽은 작품은 김멜라의 <이응 이응>이었다. 얻을 것이 많은 단편이었지만 나는 또또 생각이 가장 많이 났다. 작품 속 주인공은 같이 살던 할머니와 반려견인 보리차차를 사고로 잃는데, 그 상실감을 극복하는 과정을 SF적으로 그린다. 이렇게 작품을 간단하게 묘사하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드는 독자도 있을 텐데 내가 주관적으로 느낀 소설의 요지는 그랬다. 중간에 할머니는 보리차차에게 아프지 말아라, 아프지 마라고 하는데 아프지 말라는 것이 변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변하지, 라고 담담하게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사람이 변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문명인이기에 담배 한 대 태우며 그래, 사람은 변할 수 밖에 없지—하지만 사실 좋은 변화는 없다. 좋은 변화는 변화가 아니라 발전이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사람들은 한국의 근대사를 이야기할 때 20세기에는 빠르게 발전했고 21세기에는 빠르게 변화했다고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튼 또또야 아프지 말아라.
3) 영화
오후 5시 비행기는 처음 타보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하나도 잠이 안오는데 기분 좋게 잠이 안온다. 그래서 영화 두개를 봤다. <토니 타키타니>랑 <지구 최후의 밤>을 봤는데 둘중에 뭐가 이동진이 만점 준 영화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나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볼 영화들을 정해두고 다운로드 하기보다는 마구잡이로 열개 정도 다운받아 두고 미래의 나에게 선택을 맡긴다. 비행기를 타고 있을 나의 기분이 어떨지 모르기 때문이다.
<토니 타키타니>는 내가 영화를 볼 때 좋아하는 것들이 많이 담겨있다. 느리게 움직이는 트래킹 샷, 왜 이 오브제를 영상에 담을 때 이렇게 이상한 각도로 담았을까, 이것은 신선하게 카메라 각도랑 사운드 결합시킨거 같기는 한데 과연 잘한 것인지는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 샷, 보이스오버와 영화세계를 겹치게 하여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흐리는 것, 공간의 이동과 함께하는 시간의 이동, 화면을 3등분해서 인물을 배치하기보다는 제목답게 사람을 중심에 배치하는 등. 원래 나는 영화를 문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지난 봄에 영화 찍는 수업 하나 들은 이후로는 와, 저거 어떻게 찍었지 따위 같은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영화를 제대로 찍었다고 하기에도 부끄럽기에 테크니컬한 지식은 현저히 부족한데, 영화를 그림처럼 받아들일 수 있는 순수한 눈마저 함께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창동의 <밀양>을 이번에 다시 보았는데, 마지막 장면을 감상하며 저 햇빛은 어떤 시적 의미가 있을까 고민하기보다 와 저 샷 구하려면 진짜 오래 걸렸겠는데 몇시간 기다렸을까 생각이 먼저 들었다.
<지구 최후의 밤>은 눈이 정말 즐거운 영화다. 두시간 다 보고나서 나에게 무엇을 봤냐고 하면 탕웨이 얼굴을 보았다고 하는 것이 가장 솔직한 답변이다. 그렇지만 탕웨이가 나오는 장면들을 제외하고도 씬 하나하나가 디테일하게 계획되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가끔 영화를 보면 담배 피는 모습을 무리하게 배치해서 넣거나, 행동이나 대사에서 비는 공간을 담배로 인위적으로 채웠다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이 영화는 담배가 자주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색함이 느껴지는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 한마디로 스타일리쉬했고 스타일리쉬하려는 척하는 장면이 없었다. 금연 십년차인 사람도 담배를 피게 만들겠다 싶었는데, 사실 그게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의 전부기도 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성공한 작품이라고 본다.
4) 음악
나는 반복되는 것을 좋아한다. Pasteboard라는 밴드의 <Slowdive>를 듣다가 든 생각이다. 일본 밴드인데, 그냥 같은 말 같은 멜로디에 여러번 반복하는 노래들이 대부분인데 나는 그게 좋다. 이런 나여서 슈게이즈 음악을 좋아하는 것 같다. 좋아하는 다른 밴드인 파란노을도 노래들이 길고 같은 기타사운드가 반복된다.
나는 단순한 것도 좋아한다. 반복은 단순의 다른 이름일수도. 근데 아닌 것 같은게 한요한도 좋아한다. 한요한의 노래를 들으면 반복된다는 느낌은 받지 않지만 어딘가 단순하고 날것인데가 있어서 좋다. <반복>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기는 한데 그 노래가 단순하다고는 할 수 있어도 반복된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몇년 전에 라우브 음악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라우브 음악도 단순해서 좋아했다. 한번 친구와 기숙사에서 공부를 하는데 <I Like Me Better>를 튼 적이 있다. 플레이리스트에서 그 노래가 나오자 친구가 표정을 굳히며 갑자기 에어팟을 꼈다. 어이가 없어서 라우브가 그렇게 싫냐고 물어봤더니 자기는 이렇게 멜로디를 단순반복하는 팝송을 들으면 멀미가 난다고 했다. 그때 나는 얘 홍대병 걸렸구나 라고 생각하고 웃어넘겼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영화 이야기할 때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음악을 정말 진지한 예술로 생각한다면 들으면서 조금 더 곱씹을 수 있고 단순한 쾌락보다는 신선한 자극을 추구하며, 또 그 자극에서 쾌감을 얻을 수도 있다. 이것은 감성이 아니라 이성의 영역이다. 나는 영화를 진지한 예술로 생각하기에 소위 말하는 난해하고 지루하단 영화도 즐길 때가 있는데, 자아성찰을 해보면 그 “즐긴다”는 것은 본능적인 사랑이라기보단 이성적인 사랑에 가깝다. 예술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영화는 이성적으로 지적호기심, 또는 혀영심, 을 채우기 위해 즐기는 것 같고 음악은 복잡한 생각으로부터 뇌를 비우기 위한 수단 정도로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래도 음악이라는 아레나의 규칙이라고 해야하나, 그 구조를 잘 몰라 그런 것 같다. 음악도 차차 알아나가면서 본능 뿐 아니라 이성의 영역에서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뭐가 나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5) ~다
나는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것이 편하다. 미국인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면 놀란다. 그들은 나의 영어 쓰는 모습 밖에 모르니까. 한국어로 치면 중졸인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나도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어로 문학적인 글을 쓰면 대체적으로 느끼하게 다가오거나, 글을 잘 쓰는 다른 작가를 모방하는 것 같다. 이건 내가 배운 영어의 문제인지 나의 문제인지 모르겠다. 군대에서 한창 책을 읽을 때 나보코브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그가 원래 러시아 사람이고 영어를 뒤늦게 배웠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먹은 적이 있다. 심지어 인터뷰에서 러시아어가 가장 편하다고 했던가? 아니면 어떤 면에서 러시아어가 글을 쓸때 유용하다고 했던가? 애초에 <로리타>와 같은 책을 쓰려면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써야지 그런 퀄리티가 나올 텐데.
저번에 만난 한국계 미국인 친구가 한국 소설들은 항상 “~다”로 끝나는 것이 차갑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나 한국 문학은 대체적으로 “~다”로 끝나는 것 같기는 하다. 간혹 실험적인 글들은 존댓말을 사용하거나 문장 자체를 끝내지 않거나 할 수 있지만, 우리가 교과서에서 흔히 접하는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다"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나는 어쩌면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것이 편한게 아니라 이 문체를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를 닮아서 그런지 나는 확실히 시니컬한 구석이 있는데, 한국어로 글을 쓰면 강제로 담백하게 말을 끊어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내 자신을 보다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어떤 철학자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말로 뱉은 것이 곧 진실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는데, “~다”체로 쓰면 정말 글 한 글자 한 글자가 진실이어야만 할 것 같다. 예전에 친구가 한국어는 조사, 부사, 관형사 등이 너무 많고, 또 그들이 어떻게 결합되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져서 한국인들은 말 가지고 많이 싸운다고 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지나치게 정확하게 마음을 전달해서 싸우는 걸까, 아니면 한국어로 자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해 싸우는 걸까. 아무튼 한국어는 솔직한 언어다.
비행기가 착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