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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재경 Jul 12. 2024

뉴욕.

한달살이

맨해튼


뉴욕에서 지내고 있다.


나는 뉴욕에 대한 동경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태어날 때부터 반골 기질을 지니고 태어났기에 남들이 죄다 멋있다고 하는 것들을 하고 싶지 않아했다. 뉴욕도 그런 이유로 동경하고 싶지 않은 도시였다. 뉴욕은 패션위크도 가지고 브루클린도 가지고 브래들리 쿠퍼도 가졌지만 나를 가질 수는 없다.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내가 뉴욕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안된다. 다운타운에서 지내고 있는 나는 미드타운에서 일하고 있는 중학교 동창을 만나기 위해 지하철에 탑승했다. 지하철이 한 정거장씩 업타운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탑승하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나에게는 없는 진한 적색 에너지가 있었다. 아, 역시 나는 뉴욕을 담을 그릇이 안되는구나.


친구가 저녁을 이미 주문했다고 했기에 나도 근처에 있는 로스타코스에 들려서 타코를 주문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음식을 주문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의 결이 서로 너무나도 달랐다. 피부색부터 해서 머리색, 옷차림과 제스처, 사용하는 언어부터 안경의 유무까지. 미국이 다양성의 나라라고 한다면 뉴욕은 다양함 그 자체일 것이다. 그 속에서 보이는 한국인 커플 한 쌍이 있었는데 그들만큼은 나에게 다양해 보이지 않았다. 남자친구가 타코를 잘못 주문해서 혼나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모습은 분명 한국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었다. 한국드라마는 한국을 담을 수 있지만 미국드라마는 미국을 담을 수 없다. 미국드라마 속의 뉴욕은 뉴욕의 모형일 뿐. 모형을 믿고 뉴욕에 온 자는 뉴욕의 다양성에 파괴당한다.


아무튼 타코는 맛있었고 브라이언트 파크는 쓸쓸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어른스러웠다. 항상 긍정적이었던 친구를 보면서 어른스럽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의 표정을 보니 그 단어가 먼저 떠올라서 그에게 요새 행복하냐고 물었는데 나에게 살짝 웃으며 그냥 살만해라고 하는데 그 답변에서 나는 우리가 이제 중학생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나보다 2년 먼저 사회에 나간 그는 확실히 중학생이 아니었고 나는 그런 그에게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는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아직 어른이 아님을 직감했는지 씁쓸하게 웃었다. 공원에서 일어나 지하철역으로 함께 걸어가는데 나는 그가 슬퍼보여 어떻게 위로해 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고민하며 땅바닥을 보고 걷던 나를 그가 갑자기 등을 두드리며 괜찮을 거야라고 위로했다. 아니 나 괜찮은데. 아, 문득 우리 서로가 힘들어한다고 생각하는구나—그러고 자기 자신은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구나—그럼 누가 정답이고 누가 오답이고 나는 행복하고 너는 불행한가?


다시 일을 하러 가야 한다는 그를 배웅하고 나는 지하철에 다시 탑승했다. 빈자리에 앉아 하나둘씩 열차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을 보며 삶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했다. 저기 저 책가방 멘 남자는 뭐 하고 오는 길일까. 열심히 핸드폰하는 저 여자는 퇴근하는 걸까 출근하는 걸까. 듣고 있던 음악을 끄고 열차 소리가 귀를 찌르니 갑자기 인생을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진짜 인생 존나 잘 살고 싶은데. 씨발 진짜 잘 살고 싶다고. 지금 지하철 타는 내 시간은 흘러가는데 지금 나는 인생 잘 살고 있는 건지. 문장난하는 저 사람 때문에 지하철은 안 가는데 집에 계신 나의 부모님과 또또는 늙어간다. 이게 인생 잘 살고 있는 거냐? 인생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건데? 나는 항상 후회할 선택은 하지 않는다고 떵떵거리며 살아왔는데 후회없는 인생이 잘 사는 인생이냐? 아니면 남들이 멋있다고 하는 것 하는게 잘 사는 인생이냐? 남들이 세운 기준 말고 본인이 세운 기준으로 사는게 잘 사는 인생이냐? 잘 사는 인생은 내 마음이냐 너 마음이냐? 나는 내일 죽으면 잘 산 인생이냐? 그건 네가 판단하는 거냐 내가 판단하는거냐?


아, 인생 잘 살게 해주라. 나는 행복을 바라지 않아 그냥 잘 살고 싶어.


지하철은 챔버스 스트리트에 섰고 나는 문이 열리지 않자 으레 그렇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문을 몇 번 두드렸고 문이 열렸다. 지상으로 나오고 뉴욕의 습기가 나를 덮쳐오자 나는 분노도 아니고 허탈함도 아니고 그냥 무감각한 불쾌함을 느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회사 오피스 전층이 불이 켜져 있었는데 문명사회를 불태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호텔에 거의 다 와서 앞에 편의점을 들렀는데 문을 닫은 것을 보고 또다시 무감각한 불쾌함을 느꼈다. 문명사회인데 이렇게 일찍 닫는다고? 나는 편의점을 불태우고 싶었다. 사실 불태우고 싶지는 않았고 나 치약이 없는데 편의점 좀 열어주면 안되나.


호텔방으로 돌아와 룸메이트의 치약을 빌려 양치를 하는데 왼쪽 아래 잇몸에 염증이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실 이 염증이 사흘 전부터 있었는데 이것을 몸은 인지하고 뇌는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잇몸이 아팠지만 그저께 선배와 같이 간 순댓국집에서도 순대에 소금을 찍어 왼쪽 어금니로 씹어먹었다. 내가 무감각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감각한 것인가 모든 감각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인가 둘은 차이가 있는가. 내가 종사하는 금융업계는 삶 전체를 일에 바치는 것을 요구하는데 그 사실을 알고 들어온 사람들 밖에 없는 만큼 모두는 문명사회를 사랑한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나쁘다거나 그들의 말에 가시가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 클리셰일뿐더러 실제로 그렇지도 않다. 그냥 알게 모르게 동료들과 주식 발행은 얼마나 중요하고 상장을 이십오 달러에 하느냐 이십칠 달러에 하느냐 등에 대하여 삼십 분 동안 토론하고 있으면 나는 문명사회를 불태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그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겠지만 우리는 돈을 벌어야 하고, 일은 나를 뜨겁게 하고 차갑게 하다가 결국에는 둘이 섞여버리고 나는 미지근해진다.


무감각이 제일 무섭다. 장 뤽 고다르인가 어떤 유명한 사람이 자신은 무감각할 바에야 우울하기를 택하겠다고 했는데 나도 그렇다. 사실 무감각함은 우울함의 다른 얼굴일 수도 있다. 나는 글을 쓰고 싶고 빈티지 캠코더 들고 거리로 나가서 이쁘고 못생긴 것들을 영상에 담고 싶고 그 영상들을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로 만지작 거리며 이 컷을 7/24에 할지 15/24에 할지 그런 쓸데없는 것들 때문에 스트레스받아 고민하며 우울함을 느끼고 싶다. 잘 사는 인생은 무감각과 매번 맞서 싸우는 인생이다. 맞서 싸우려면 돈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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