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민 Jul 09. 2023

하트 시그널에 나오는
한겨레처럼 해주세요.

나는 다양한 종류의 연애 프로그램 애청자다. 대한민국에 연애 프로그램 붐을 이루어낸 하트 시그널, 극한의 설정 속 미묘한 감정의 환승 연애, 극사실주의 B급 감성 나는 솔로, 나랑 딱히 관련 없지만 설레는 돌싱글즈까지. 굵직했던 연애 프로그램들은 편견 없이 즐기는 편이다. 그렇다고 모든 (때때로는 재미가 없는) 연애 프로그램까지 챙겨보는 건 아니니 남의 연애에 미친 사람으로 오해는 마시길. 나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은 다들 알겠지만 올해 여름에는 하트 시그널 시즌 4가 시작되었다.


이번 시즌 4에는 다양한 스타일의 남자들이 나온다. 왜 올해는 여자 출연자보다 남자 출연자가 눈에 들어오는지, 다들 마음에 든다. 아아. 얼굴이나 성격, 연애 스타일, 이런 것이 아니라 근래 내 관심사인 헤어스타일 이야기다. 연애 프로그램에 나오는 일반인 출연자는 준연예인급 외모와 끝없이 긴 가방끈과 번쩍번쩍한 직업 외에도 옷이나 헤어 스타일도 멋지다. 그러니 나의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참고하기에 하트 시그널은 근사고 적합했다. 특히 이번주 금요일에는 남출의 헤어 스타일을 더 유심히 보았다.


아무래도 한겨레(남자 출연자)가 좋은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외모, 성격, 연애스타일이 아닌 헤어 스타일 이야기다. 굵게 들어간 컬, 단정하게 이마를 가리면서 살짝 개방감을 준 앞머리, 차분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연출. 한겨레의 머리를 똑 떼어다 내 머리에 씌어놓고 싶었다.


금요일 밤. 하트 시그널을 보다가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야. 나 한겨레 머리 하려고 하는데 어떠냐?”

“하트시그널 한겨레? 그건 머리가 이쁜 게 아니라 잘생겼으니까 이뻐 보이는 거야. 너는 안돼”

“아니 그건 아는데. 아니 근데, 나 한겨레 좀 닮은 것 같은데, 어울릴 것 같지 않냐?”

“너 그거 미용실 가면 절대 이 느낌 안 나온다고 말할 거다 ㅋㅋㅋㅋ”

“그냥 내가 해보고 싶어서 그래. 미용실 가면 디자이너 쌤한테 말해야겠다”

“100%다. 허튼짓하지 말고 병장 머리해”


친구의 우려찬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한겨레의 헤어 스타일이 잘 보이는 사진을 찾아 갤러리에 저장해 버렸다. 미용실은 며칠 뒤 일요일 점심으로 예약했으니 그 사이 용기만 준비되면 나는 한겨레가 될 수 있다. 아니, 한겨레 헤어 스타일을 할 수 있다.




22년 4월 1일. 어제까지는 직장인 오늘은 백수. 직업이 바뀌었으니 헤어 스타일을 바꾸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타이트하게 아껴야 하는 생활비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감에 짝퉁 아이비리그컷을 고수하고 있었다. 


당시 다니던 동네 미용실 어머니뻘 원장님께 시술받은 짝퉁 아이비리그컷을 나름 좋아했다. 원장님은 비록 아이비리그컷의 대명사인 유아인 헤어 스타일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손짓과 발짓으로 설명해 얼추 비슷한 아이비리그컷을 구사했다. 말이 좋아서 아이비리그컷이었지 사실 군인 머리에 가까웠다. 물론 10년 전 병장 시절의 젊음을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살짝 젊어진 느낌과 함께 깔끔한 느낌을 낼 수 있었다.


젊어지는 비주얼적인 효과 외에 제일 좋았던 점은 머리를 가꾸는 시간을 최소화할 수 있고 여름에 시원하다는 점이다(반대로 겨울에 머리가 굉장히 춥다). 깔끔함과 편리함에 익숙해져 몇 계절을 짧은 머리를 하고 다녔는데, 퇴사한 기념으로 머리를 바꾸어 볼까 했지만, 세계적으로 하락했던 주식처럼 내 경제력도 하락했기에 끝끝내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다시 취업해버리고 말았다. 이전 글에 나온 것처럼 금융치료의 일환으로 헤어 스타일도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매주 금요일 하트 시그널을 보며 새로운 헤어 스타일 탐색을 했던 것이다.




드디어 일요일이 되었다. 느지막이 일어나 제일 먼저 한 일은 저장해 놓은 한겨레의 사진을 보면서 흐뭇해하는 것이었다.  그저 오늘 내가 한겨레 헤어 스타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던 것이니 오해는 마시길.


예약시간에 맞추어 덥수룩한 머리를 최대한 단정하게 드라이하고 미용실에 도착했다. 예약을 해놓아서 기다림 없이 바로 디자이너 쌤을 만날 수 있었다.

“머리 많이 기르셨네요. 오늘은 펌으로 예약해 주셨는데 어떻게 하시겠어요?”

“안 그래도 제가 요즘 하트 시그널 보는데 이분 헤어 스타일이 마음에 들어서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나는 갤러리에 저장해 놓은 한겨레의 머리를 두 손가락으로 확대해 디자이너 쌤께 보여드렸다. 이미지를 확대하니 한겨레의 짙은 이목구비도 화면에 가득 찼다.

“이렇게는 안 돼요”

(적잖이 놀라며) “네??”


역시 친구의 말대로 내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까무잡잡한 내 얼굴로는 한겨레 머리는 어림도 없는 걸일까? 나는 그럼 무슨 머리를 해야 하는가. 하늘도 내 마음과 같았는지 갑자기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 사진보다 기장이 조금 짧으셔서 이렇게 똑같이는 안 나오고 펌 하시면 이런 느낌 나실 거예요”

바로 쌤은 드라이기를 집어 들어 내 머리를 요래조래 만지더니 사진 속 한겨레 헤어 스타일과 비슷한 머리 스타일링을 임시로 만들어주셨다. 좀 괜찮은데?라고 생각해 버린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이런 느낌 괜찮아요 ^^. 이렇게 해주셔도 될 것 같아요”

역시 나는 한겨레랑 좀 닮아서 잘 어울릴 것 같아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자리에 앉아 디자이너 쌤의 손길을 기다렸다.




한 시간 반동안 머리를 볶고 자르고 스타일링해 한겨레 스타일이 완성되었다. 좀 잘생겨진 내 모습에 만족해 미소를 지어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디자이너 쌤은 드라이하는 법을 알려주셨고 머리에 에센스로 마무리도 해주셨다. 아주 오랜만에 바뀐 헤어 스타일에 기분이 좋았다. 하늘도 내 기분과 같았는지 내리던 폭우가 그치고 햇빛이 내렸다.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며 다시 새로운 머리를 살폈다. 굵게 컬이 들어가고, 앞머리는 단정하게 이마를 가려졌지만 살짝 이마가 보여 개방감 있고 인상도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물론 거울 속에 연애 프로그램 출연자가 서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보다 좀 더 까무잡잡하고 덜 잘생긴(못생긴 거는 아니겠지?) 내가 서있었다. 새롭게 바뀐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한 손으로 긴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겨도 다시 자연스럽게 세팅되는 새로운 헤어 스타일이 마음에 쏙 들었다.


사실 헤어 스타일을 바꾼다는 건 하트 시그널 출연자들처럼 잘생겨지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죽음이라는 끝에 다다르기 전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어나는 일상에 작은 변화를 주기 위함이었다. 퇴사를 하고 직업이 바뀌고, 무에서 살고, 작가가 되고, 다시 취업을 하면서 내 일상은 많이 바뀌었는데 똑같은 모습을 간직했던 내 헤어 스타일도 변화가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새로운 헤어 스타일이 마치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주는 기분이 들게 하니까. 이전의 내 모습은 내가 살던 일상과 함께 시간에 흘려보내고 새로운 일상을 맞이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또 살아보자라는 다짐이 섞여 있는 것일지 모른다.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일상을 맞이하며. 설령 그 일상이 완벽한 일상은 아니어도 내 인생에 주어짐에 감사하며.


그리고 새로운 헤어 스타일로 더 잘 생겨진 건 사실이니까(하하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