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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Dec 02. 2024

서른네 살인데 모은 돈이
삼천 밖에 안 돼요.

1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7년 전이었다. 그 당시 나는 혼자 사는 즐거움은 잃어버리고 옆구리가 시리기를 넘어서 얼어붙을 정도로 외로웠다. 아무래도 대학교 2학년 때 CC였던 전 애인과 헤어진 후 제대로 된 연애를 쉰 지 4년 정도 되었으니 외로움은 고질병이었다. 그때의 나는 사랑에 대한 깊은 갈망과 결핍을 가지고 있었다.


외로움을 만성질환처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든 만나려고 노력했다. 독서모임이나 와인 동호회에 가입해 이런저런 사람들과 썸을 탔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연인 관계로 발전되려고 하면 그들은 하나같이 연인 관계가 성립되기 전 성관계를 원했고 나는 끓어오르는 성욕을 참으며 정식으로 사귈 때까지는 성관계를 갖지 않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 번의 어김도 없이 그들과 성관계를 가졌다. 사정 후 밀려오는 후회감과 공허함에 상대에게 피어오르던 호감의 감정은 맥없이 끊어졌고, 그러면 다시 시린 바람처럼 외로움이 찾아와 새로운 상대를 찾아 나섰다.


그 사람은 직장 2년 차 사원일 때 내 오른쪽 자리에 앉아있던 후배에게 소개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줄 알았지만(새로운 모임에 나가 사랑은 헌팅하듯 돌아다녔던 것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 가치관마저 흔들려 소개팅이라는 어색한 자리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외로움에 취해 물불을 가릴 수 있을 정도의 온전한 정신머리가 아니었다.


"도윤 선배. 연애 왜 안 하세요? 제 친구 중에 변호사인 친구 있거든요? 저랑 같은 대학 나왔고 살짝 도윤 선배 이야기하니까 관심 있어하던데 어때요?"


"저는 괜찮(지 안) 아요. 자연스러운 만남은 추구해서. 하하."


"엥? 마지막 연애도 4년 전이시라면서. 일단 제 친구 사진 한번 보여드릴까요?"


그렇게 그 사람의 표정을 처음 보았다. 멋있게 생겼다고 해야 할까? 고양이처럼 찢어진 눈매에 새하얀 피부는 분명 이뻐야 하는데 자신감 넘치고 프로페셔널한 변호사의 이미지가 떠올라 멋있는 걸 넘어 존경심도 느껴졌다. 그렇게 옆자리에 앉아있던 후배의 소개로 그 사람을 처음 만났다. 내 나이 스물일곱, 그 사람은 스물여섯이었다.





2

첫인상은 사진과 똑같았다. 차가운 얼굴이 멋진 사람. 살짝은 불편해 보이는 정장을 입고 온 그 사람은 수줍음 없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 사람은 내가 담배를 피우는지, 즐겨하는 게임이 있는지, 키는 몇 인지, 연애는 오래 하는 편이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 사람에게 좋아하는 뮤지션이 누군지, 못 먹는 것이 있는지, 취미가 무엇인지 물어보았고 우리는 서로에게 거짓말 없이 답했다. 나의 질문은 순수하 관심에서 나왔던 질문이었지만 그녀의 질문은 일종의 체크리스트였다고 했다. 나는 10개 질문 중 8개를 통과하여 고득점을 기록하며 통과했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는 소개팅으로 만나 5번의 데이트를 4주 동안 했다. 만날 때마다 항상 즐거웠던 우리의 데이트는 그 사람을 향한 내 호감도를 수직상승시켰다. 그 사이 그 사람은 한 번의 성관계도 요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모습이 날 더 설레게 만들었다. 나의 마음은 호감과 사랑 사이를 왔다 갔다 하기에 이르렀고 내가 먼저 그 사람에게 확신이 생겨 고백했다.


"슬아. 네가 내 옆에 있으면 내 마음이(사실은 옆구리)가 따뜻해지는 것 같아."


"나는 네 따듯하고 큰 손이 좋아."


"우리 제대로 만날까?"


우린 이미 그러고 있어라고 말하는 듯 그 사람은 내 손을 깍지를 끼며 말해주었다.



그 후로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서로의 일상에 스며들었다. 야근이 늦어 밤늦게 퇴근해도 페이스타임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통화하다 잠들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서로에게 하루를 시작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 상사 때문에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서로에게 털어놓았다. 기쁜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서로에게 알리고 제일 먼저 축하해 주는 사람이 되었다. 매해 생일, 크리스마스, 새해, 100일, 1000일 같은 기념일은 휴가를 쓰고 함께 시간을 보냈고, 여름휴가는 매년 발리, 방콕, 오사카 등으로 4박 5일씩 해외여행을 했다. 내 아이폰 사진첩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 사람이 찍혀있었고 우리가 같이 찍은 사진은 하나도 빠짐없이 인스타 스토리에 올라갔다. 


내가 원하고 바라던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다. 성관계를 먼저 하지 않은, 그래서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인연을 드디어 찾았다. 그 사람과는 결혼 기약 없는 연애도 가능했고 나 혼자 사랑한다 말하는 관계도 괜찮았다.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려고 노력했고 나와 닮아있는 그 사람의 단점들도 받아들이고 좋아했다. 나에게 평생에 한번 있을 사랑이었고 그 사람은 나의 심장 그 자체였다.


그 사람을 영원히 사랑하고 싶고, 내가 죽어 흙이 되어 돌아가도 그 사람을 향한 내 마음은 영원할 정도로 사랑했다. 


나에게 하나뿐인 사랑이여.





3

한도윤이 재미없어진 건 그와 7년을 만난 뒤였다. 물론 처음에는 도윤과 섹스를 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로 좋아했기 때문에 만났다. 이전의 애인들은 속궁합이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먼저 섹스를 한 후 성적인 끌림 때문에 사귄 애들이었다. 그중에는 괜찮은 애들도 있었고 거지 같은 쓰레기도 많았는데 한도윤을 만날 때는 그런 생활에 지쳤는지 나도 모르게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그 사람이 충분히 좋은 사람인지 검토했다.


일단 담배 피우는 애들은 냄새가 역겨워서 싫었는데 도윤은 그렇지 않았다. 게임하는 애들은 정신이 항상 게임을 향해있어서 싫었는데 도윤은 그렇지 않았다. 키 작은 애인은 그냥 내가 싫어했는데 도윤을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짧은 연애만 했는데 도윤은 그렇지 않았다. 도윤은 내가 하고 있던 모든 것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도윤이 좋았다.


데이트를 두 번인가 했을 때였나. 도윤은 나에게 수줍게 고백했다. 나는 도윤의 손을 잡으며 제대로 만나고 싶다 말했을 거다. 사람에게 좋아한다 고백을 받고 나도 좋아한다고 맞장구 쳐주는 일이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우리는 7년을 만났다.


도윤은 항상 나에게 진심이었다. 매일 밤 먼저 페이스타임을 걸어주었고, 매일 아침 카톡에 하트를 담아 보내주었다. 내가 상사 때문에 기분이 나쁜 일이 있어 털어놓으면 도윤은 항상 내 편이었고, 승진을 했을 때 제일 먼저 축하한다고 꽃다발을 선물해 주었다. 매해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는 명품을 선물해 주었고, 100일에는 티파니 목걸이를 1000일에는 까르띠에 커플링을 해다 주었다. 여름휴가 때는 내 휴가 일정에 맞춰 발리, 방콕, 오사카 등 월급과 보너스를 털어 비행기와 풀빌라를 빌려 여행을 가자고 했고 나는 그곳에서 도윤이 찍어준 사진 중 잘 나온 사진만 골라 인스타 스토리를 채웠다.


내가 태어나 처음 받아본 순수한 사랑을 도윤에게 받았다. 섹스도 먼저 하지 않았고,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확인해 만난 나에게 알맞은 사람이었다. 그는 결혼을 보채지도 않았고 먼저 사랑한다 말해주는 사람이었으며 나의 뾰족한 성격도 모두 받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도윤을 나도 사랑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뭘 느끼는지 모르겠다. 외롭지는 않지만 지루하고 안정적이지만 심심한. 계속 이렇게 살다 죽을 수 있을까? 그게 내가 원하는 삶일까?


한 번은 도윤이 내게 말했다.


"슬아. 사랑해."


나는 대답했다.


"고마워. 날 사랑해 줘서."







4

도윤은 몰랐겠지만 결혼 적령기 로펌 변호사에게는 많은 소개팅 자리가 들어온다. 물론 도윤을 소개팅으로 만났기 때문에 그도 어렴풋이 알고 있을까? 도윤은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직접 두 눈으로 본다 해도 믿지 않을 사람이다. 


도윤을 만나고 첫 소개팅을 나간 건 온전히 회사 후배의 끈질긴 권유 때문이었다.


"슬이 선배. 슬이 선배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기는 건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니까요?"


"그래서 또 그 번준인가 범준인가 하는 사람이랑 소개팅하라고? 됐어. 나 지금 도윤이랑 7년 만났는데 어떻게 그걸 비밀로하고 소개팅을 나가."


"근데 선배 내 말 들어봐요. 범준 선배는 진짜 잘 나가는 사업가고, 진짜 성격이 너무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거기에 성수에 아파트 있지, 부모님 잘 살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사람인데 선배를 우연히 보고 만나보고 싶다잖아요. 이 정도면 그냥 만나는 볼 수 있지 않나?"


"그러니까 내 애인이랑 비슷한 사람인데 내가 소개팅을 나가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면, 결국 네가 얻는 게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빙...고. 그러니까 소개팅만 한번 나가주세요."


"그래. 일단 너 때문에 한번 나가는 거다. 나랑 도윤이 결혼식은 올 생각은 하지 말고."


그렇게 일단 소개팅을 나가겠다고 말했다.




소개팅 날에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후배에게 약속한 거라 나갈 준비를 했다. 도윤에게는 주말출근을 한다며 바쁠 거라고 이야기해 놓았다. 도윤은 내가 네다섯 시간 카톡을 보지 않아도 마냥 기다릴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진 애인이었다. 과연 소개팅에 나오는 사람도 그럴 수 있는지 테스트해 볼 겸 일부러 소개팅 약속시간보다 늦게 가버렸다.


"안녕하세요."


"윤슬씨 맞으시죠?"


"아 네. 늦어서 죄송해요. 오다가 차가 밀려서."


"그럼 좀 더 일찍 나오셨어야죠."


뭐지 이 사람. 날 만나고 싶다고 했으면서 이렇게 차갑게 대하는 게 어색했다. 생각보다 성격이 좋은 사람은 못되나 보네. 그리고 다음 날 아침까지 소개팅에 나온 그 사람과 같이 있어버렸다.






5

그 사람이 요즘 날 보는 게 뜸하다. 적어도 주말 하루는 보는 게 우리의 일상이었는데 요즘은 그것마저도 힘들다. 그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어서 그 사람이 나와 헤어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그 사람과 이 주 만에 겨우 만나 석촌 호수를 걷고 나란히 걷고 있었다.


"도윤아. 너도 알고 있지?"


"응? 어떤 거?"


"내가 할 이야기 있는 거 눈치채고 있었지?"


"......"


"뭐 이제 숨길 것도 없고 그냥 말할게. 나 요즘 다른 사람 만나. 회사 후배 때문에 억지로 소개팅 나갔는데 그 사람에게 내가 끌리더라고. 그래서 바람 좀 피웠어. 몹쓸 짓인 거 알고 있었는데 또 그게 내 맘대로 안되더라. 너랑 먼저 정리하고 만났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 건 미안해. 사실 쫌 됐어. 더 이상 너 사랑하지 않는 거. 근데 계속 널 두고 바람피울 수는 없으니까. 뭐 어차피 그게 아니었어도 헤어졌을 거야. 나 원래 좀 못된 거 너도 알지? 나 따뜻한 사람은 못되잖아. 이제 나 같은 사람 다신 만나지 말고 잘 살아."


"......"


나는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멈췄고 그녀는 나를 보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었다.


나는 멈춰 서서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남긴 말을 곱씹으며 내 가슴과 머리와 주먹과 온몸으로 내 속의 들끓는 감정을 느꼈다. 


내가 준 순수한 사랑에 대한 그 사람의 배신. 


나에 대한 업신여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고백.


그 사람이 없는 내게 남은 삶.



나는 주먹을 쥐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이내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그냥 울어버렸다.


엉엉 울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6

그 사람과 헤어지고 후배는 또 좋은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오른쪽 자리에서 여러 얼굴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소개해준 사람과 그렇게 헤어졌으니 책임이라도 지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후배가 추천해 주는 사람들과 소개팅을 했다. 물론 소개팅을 나가서 진지하게 발전된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맨 처음에 내뱉는 말 때문이었다.


"저 서른네 살인데 모은 돈이 삼천 밖에 안 돼요."


내 나이 즈음에 결혼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당황을 하며 어색한 대화를 나누다 헤어졌다. 가끔은 불쾌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모은 돈의 액수는 그 사람과의 7년의 연애의 성적표였고,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지표이자, 지금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향한 방위표였다. 그러니 아무도 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니 후배도 소개팅을 더 이상 주선하지 않았다. 나는 이전처럼 독서모임이나 와인 동아리를 나가지도 않았고, 자연스러운 만남이든 뭐든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새로운 사람은 만나는 일도, 그리고 썸을 타거나 데이트를 나갈 일도 없어졌다.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통장 잔고는 늘어났다. 하지만 통장에 찍히는 숫자와 다르게 내 마음은 점점 줄어들었다. 쪼그라들었다. 쪼그라들다 못해 아무것도 아닌 점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무(無)에 이르렀다. 내 마음이 없어졌다.


7년 동안 이어진 연애의 결말, 실패의 꼬라지는 이런 모습이었다. 나이는 서른 넷이고 통장에 모인 돈은 삼천 몇 백만 원 밖에 안 되는. 마음이 쪼그라들어 사라진 텅 비어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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