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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민 Jun 29. 2022

진정한 자유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 하는 가?

[ 06. 지적자본론 ep.23/책 ]

* 글은  에피소드 부터 이어져 오는 시리즈입니다.  브런치로 오셔서 이전 에피소드를 이어서 읽으시기를 추천드립니다 :-)


마스다 무네아키가  <지적자본론> 점심시간 독서 모임에서 읽게 된다. 이전   하나인 <프리워커스>에서 추천한 책이다. 마스다 무네아키는 츠타야 서점을 운영하는 컬처 컨비니언스 클럽 주식회사의 최고 경영자이자 창업자이다. 한마디로 츠타야 서점을 만든 사람의 이야기다.  책에서는 마스다 무네아키의 일과 사업에 대한 그만의 철학을 들을  있다. 그중 나에게 가장 공감이  말은 마스다 무네아키가 말하는 자유에 대한 정의였다. ‘하고 싶은 일을   있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은 그만둘  있다.’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는  아니라 하기 싫은 일에서도 벗어날  있는 선택권이 있는  진정한 자유라고 그는 말했다. 나에게는 역발상처럼 다가왔다.  충격적이었다.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 것조차 인생에 중요한 일이니까.


마스다 무네아키의 정의는 저렇다. 물론 나도 정말 통쾌하게 공감했다. 그렇다면 나의 정의는 무엇일까? 나는 퇴사 생각을 하면서 주체적, 자발적, 자유 같은 비슷한 개념들을 쫒아 왔는데 과연 나의 ‘자유’란 무엇일까? 나에게 ‘자유’란 무엇일까?


갑자기 생각나는 건 태국에서 국제학교를 다닐 시절 한 영어 시간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토론을 진행했다. 주제는 ‘행복’이었다. 어떨 때 우리는 행복할까? 선생님은 먼저 지금 행복한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럼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지 또 한 번 질문했는데, 수업에 있던 친구들은 각자만의 정의를 이야기했다. 그때 내가 대답했던 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나는 ‘계획한 것들이 척척 들어 맞을 때’라고 대답했다. 물론 지금은 꽤 시간이 흘러 이 행복의 정의는 외부에서 협조해야만 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 당시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학생이었고 부모님의 영향과 친구들의 영향, 선생님의 영향이 꽤 나를 좌지우지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대학에 가니 계획을 내 맘대로 세울 수 있었고, 실행에 옮기니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정말 행복한 게 극에 가까이 가면 삶이 감사하다는 경험도 했다. 물론 그 후 군대와 사회는 그렇지 않았지만. 다양하게 엮인 관계와 권력의 싸움이 잦았다. 그랬으니 무탈할 순 있어도 행복하진 못했던 거였다. 그런데 이게 왜 자유의 정의와 관련이 있을까? 곰곰이 들여다보았다.


나의 자유는 행복을 향해 가는 수단이다. 아니면 행복은 자유로 가는 나침반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 무의식 속엔 ‘내가 하고자 하는 게 맘대로 될 때’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마스다 무네아키의 자유의 정의와 비슷하게, 나도 ‘하고자 하는 것을 맘대로 할 때’ 자유를 느낀다. 그래서 오랫동안 자유를 얻으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나에겐 자유와 행복은 큰 교집합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더해지는 것은 무엇이냐면 바로 ‘미래’다. 나는 하고자 하는 것을 계획한다. 즉 자유롭고 행복하여지려면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나는 계획을 세워야 하고 그걸 실행에 옮겨야 한다. 물론 결과까지 좋게 나온다면 더 좋겠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결과는 내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 부분은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내려놓았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계획 하기와 실행하기, 이 두 과정에서 자유를 느끼고 행복을 느낀다. 이런 나만의 메커니즘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사에 다니면서 나는 미래에 대한 계획조차 세우기 힘든 상황이었다. 회사안에서는 내가 하는 일에 따른 사람들의 개입이 너무 많았고 그건 내 사생활까지 침범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정의하는 자유에서는 외부의 개입이 적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주체성을 많이 쫒았던것이다. 당연히 완전한 주체성을 가지려면 세상과 고립되고립돼야 한다고한다. 대신 주체성을 최대화최대화하고을 최소한으로 하면 내가 생각하는 자유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동력으로 미래를 꿈꾸고 실행하는 것.’것.’이게 생각하는 자유의 정의일 것이다. 마스다 무네아키의 자유와 나의 자유가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통쾌하게 공감할공감할 수밖에고 책에 그 부분에 밑줄을 그어놓았다.


한 번쯤은 생각하는 ‘자유’의 정의는 무엇일까 고민하는 것을 추천한다. 우리가 ‘일’은 무엇이고 ‘성공’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맥락에서 말이다. 당연히 우리는 모두 각자의 정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국제학교에서 반 친구들과 나누었던 토론에서도 그랬다. 한 단어도 정의가 제각각이다. 이렇게 나만의 정의를 만들다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것, 필요로 하는 것을 더 들여다볼 수 있다. 나만의 메커니즘을 찾을 수 있다. 나에게 자유란 주체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니 정말 ENFJ에게 얼추 맞는 자유의 정의를 하고 있다. 물론 이런 자유에 도달하면 또 자유의 정의가 바뀔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일단 지금 회사의 상황은 자유와 조금 멀어진 것 같다. 내가 답답함을 느끼고 행복보다는 비어있는 감정의 상태로 살았던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생각을 <지적자본론>에서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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