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광장의 군상에서, 문득

광장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대하는 태도

by 류재민

서울역에 내리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게 뭔지 아세요? 비둘기? 맞이방? 네 그런 것도 있는데요. 비둘기와 맞이방을 빠져나오면 커다란 광장을 마주합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기자회견장이 있는 삼청동 한국금융연수원에 가려면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데요. 그 마을버스를 타려면 이 광장을 지나가야 합니다.


계단을 내려와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비둘기만큼이나 많은 선별 진료소 대기자들입니다. 길게 늘어선 줄 사이로 부모님 손 잡고 온 어린이도 꽤 많습니다. 기껏해야 서너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을 보면 감정이 북받쳐 오릅니다. 저 어린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른 아침부터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선별 진료소를 지날 때마다 울컥울컥 합니다.


어떤 때는 어린아이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일부러 고개를 숙이거나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지나기도 합니다.

서울역 광장 앞에 설치된 선별 검사소 모습입니다.
선별 진료소를 지나면 바로 마주치는 노숙자용 텐트입니다. 이런 것부터 해결해야 내일을 바꾸든, 사람이 먼저든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안타까운 장면은 선별 진료소를 애써 지나치자마자 나옵니다. 바로 노숙자용 텐트인데요. 추위를 막기 위해 펼쳐진 텐트 20여 개가 길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어있습니다. 텐트 안에는 아직도 잠들어 있는 노숙자도 있고, 일찍 잠이 깬 이들은 아침부터 소주와 막걸리를 땅바닥 위에 아무렇게나 펴놓고 먹습니다. 세수도 하지 않은, 자고 일어나 바로 앉은 모습입니다. 한 손에는 마스크, 다른 한 손에는 담배가 쥐어져 있습니다.


저들은 어쩌다가 노숙자가 되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그만 마을버스를 놓칩니다. 차 한 대를 놓치면, 15분 정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배차 간격이 불규칙하면 20분도 기다리고, 운이 좋으면 10분 만에 오기도 합니다. 운전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정해진 시간이 있다고 해도 딱딱 맞추긴 어려운 법입니다.


퇴근 무렵, 다시 서울역 광장을 지나오다가 문화역 서울에서 무료 전시 안내문을 발견했습니다. ‘사물을 대하는 태도’. 공예 기획전인데요. 기차 시간이 조금 남아 구경삼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입구에서 안내원이 소책자를 건넸습니다. 다음은 소책자 첫 장 강재영 예술감독의 글 중 맨 마지막 문단입니다.


PC(Political Correctness)뿐만 아니라 EC(Ecological Correctness)도 긴급히 요청되고 있는 이 위기의 시대에 대응할 새로운 공예와 디자인에 대한 탐색이 이번 전시의 목표입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다룬 이번 전시를 통해 공예의 태도와 사회적 실천들을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서울역 광장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리고 있는 공예 기획전 작품입니다.

▲대지의 사물들 ▲생활의 자세들 ▲반려 기물들. 세 가지 테마를 둘러보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인간과 자연, 사물을 존중하는 다양한 공예의 태도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와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간의 소중함도 깨달았습니다.


초조한 눈빛으로 검사를 기다리는 대기자들, 삶의 의지가 꺾인 눈동자를 한 노숙자들, 공예작품을 바라보는 갤러리 안의 관람객들. 이들은 반경 100m 이내의 공간에서 서로 다른 눈빛으로 각자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이러니’입니다.


오늘 하루 확진자 수는 조금 줄었습니다. 겨우내 들어앉았던 노숙자 텐트는 조만간 철거할 예정입니다. 공예 전시회도 5월 29일이면 막을 내립니다. 어느 때가 되면 새 국면을 맞고, 또 그에 맞는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겠죠. 또 그것이 ‘삶’이겠죠.


‘내일을 바꾸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당선인은 집무실을 옮긴다고 난리고, ‘사람이 먼저’라는 현직 대통령은 버티기로 맞서고 있습니다. 청와대 동쪽 끝 춘추관에서 삼청동 인수위 기자회견장이 있는 금융연수원은 걸어서 10여 분에 불과합니다. 그 짧은 거리를 두고 신구 권력이 아웅다웅하는 목소리가 못내 씁쓸한 요즘입니다.


지난 5년, 과연 사람이 먼저였나요? 또 내일은 정말 바뀔까요? 서울역 광장의 다양한 군상의 얼굴에 따듯한 봄바람이 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내일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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