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이 밥 먹고 하는 일이 ‘취재’입니다. 독자가 궁금해하는 걸 취재하고, 기사로 알리는 게 기자들이 밥 먹고 하는 일입니다. 독자들이 궁금하지 않은 건 백날 써봐야 소용 없습니다. 안 봅니다.
취재와 기사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럼, 질문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모르는 걸 물어보는 게 바로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질문이 ‘좋은 질문’일까요? 질문에 좋은 질문이 있고, 나쁜 질문이 있냐고요? 네, 있습니다. 답변을 바라는 사람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고 말할 수 있도록 ‘요점만 간단히’해야 좋은 질문입니다.
‘나쁜 질문’은 반대입니다. 무엇을 물어보려는 건지 통 모르겠는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길게도 늘어놓습니다. 일장 ‘연설’이나 ‘훈계’ 나아가 ‘취조’하는 것처럼 따지는 형편없는 기자들도 많습니다. 그건 질문이라고 할 수조차 없습니다.
좋은 질문과 나쁜 질문 사이에 ‘이상한 질문’도 있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말 그대로 ‘이상한’ 질문입니다. 어떤 답이 나올지 알면서 질문을 하는 경우입니다. 다분히 의도된 질문이라니,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상한 질문은 왜 할까요?
쉽게 말해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 사전에 질문과 답변을 주고받는 겁니다. 기자회견이나 간담회 자리에서 ‘불편한 질문’을 피하고 싶을 때 이런 방법을 택합니다. 과거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를 출입했던 기자들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미리 질문할 순서를 정해놓고, 짜 놓은 각본대로 답변했다는 걸 아는 국민은 얼마나 될까요?
대통령은 국정 농단만 한 게 아니라 국민을 기만했고, 기자들도 '한통 속'이었습니다. 저도 당시 청와대를 출입했습니다. 그래서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변명을 하면, 저는 ‘질문의 시혜’를 입을 특권층 기자단에 속하지 못했습니다. 쉽게 말해 ‘마이너 언론’ 취급을 당한 셈입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같은 출입처를 출입하며 취재하는 기자들 사이에 계급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자들이 밥 먹고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기자’와 ‘하지 못하는 기자’로 등급을 매겨 구분하는 현실도 말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도 아니고, 참 어이가 없습니다.
EBS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말문을 터라' 유튜브 영상 중.
질문할 기회를 주면 또 뭐 합니까? 제대로 된 질문을 못 하는데요. 지난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폐막식 때 벌어진 일입니다. 당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개최국인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할 기회를 줬습니다. 그러나 손드는 기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중국 기자가 일어나 질문권을 요구했고, 결국 그 기자가 한국 기자를 대신해 미국 대통령에게 질문했습니다. 전 세계인 앞에서 톡톡히 망신당했던, 낯 뜨거운 ‘사건’이었습니다.
정권이 두 번이나 바뀐 지금은 어떨까요? 여전히 ‘언론 카르텔’은 용산 대통령실부터 일선 시군 기자실까지 산재해 있습니다. 곳곳에 진을 치고 철옹성처럼 단단하게 성을 쌓아 실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지난 5월 윤석열 대통령 취임 직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방한해 첫 정상회담을 가졌는데요. 한 블로거가 이날 공동 기자회견을 본 뒤 쓴 글이 인상적입니다.
정부는 한국 기자는 한국 대통령에게 미국 기자는 미국 대통령에게만 질문하라는 황당한 요청을 해놓은 상태였다. 이 역시 이해되지 않는 조치다. 기자회견이라는 것이 어느 기자든 어느 나라 대통령에게 자유롭게 질문하는 것이 허용돼야지, 무슨 한국 기자는 한국 대통령에게, 미국 기자는 미국 대통령에게 질문하라는 법이 있는가. 외신 기자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내놓았고,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역시 질문은 한 개만 받아야 한다며 자신이 윤석열 대통령을 보호한다는 농담을 던졌다. 참 어이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블로그 출처: https://blog.naver.com/englishwork/222753154672]
참고로, 이 자리에도 대통령실을 출입하는 기자들은 장소가 협소하다는 이유로 소수 인원만 참석했습니다. 국내 정치 이슈나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을 취재할 때는 국회 본관 복도에서, 검찰청사나 법원 앞에서, 그것도 모자라 당사자의 집까지 찾아가 집요하게 질문하는 기자들 아닙니까? 그런데 절대권력 앞에서는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합니다. 온순하고, 공손해집니다. “왜 질문을 막습니까, 왜 질문을 못하게 합니까”라는 질문조차 못 하거나 안 합니다. 아이러니합니다.
질문 없는 기사는 생명력이 약합니다. 기사의 질도 약합니다. 그래서 파급력이 떨어집니다. 물음표를 던지고 느낌표를 전하는 것이 ‘기사다운 기사’입니다. 권력에 맞서려면 기자들의 질문이 많아져야 합니다. 권력 앞에선 ‘외람된 질문’은 없습니다. 공적인 공간에서 대통령에게 "파이팅!"을 외치는 건 부적절합니다.
질문이 많아져야 세상도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질문 없는 사회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처럼 일방적이고, 획일적이고, 기계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영화 속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찾으라”는 키팅 선생의 가르침처럼, 우리는 질문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강남순 미국 텍사스대 교수는 『질문 빈곤 사회』의 부제목을 ‘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썼습니다. 이처럼 질문이란,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