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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재민 Apr 09. 2023

영지 누나에게 일어난 일

에피소드 24.

꽃이 진 감나무 가지에 연두색 열매가 알알이 맺히기 시작했다. 열매는 작고 동글동글해 공깃돌로 쓰기 좋았다. 그날도 나와 재식이 형은 감나무 밑에 있었다. 그러다 재식이 형이 감나무 위로 올라갔다. 나는 잔뜩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뭐 하려고 그래? 그러다 점백이 할머니한테 들키면 큰일 나.”     

이 동네 아이들에게 영지 누나 할머니는 ‘점백이 할머니’라고 불렸다. 이마 한쪽에 난 큰 점 때문이다. 할머니는 “이 점은 복점”이라고 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복을 많이 받는 날이 올 거라며 호언장담했다.      


재식의 형이 손이 감나무 가지를 잡아당기려는 순간, 날렵한 다른 팔이 손을 낚아챘다. 나는 순간 눈을 찔끔 감았다. ‘우리 집 감을 왜 따려고 해!’라는 듯 영지 누나가 떡하니 서 있었다. 누나의 핏기 없는 얼굴과 눈 밑 다크서클을 마주쳤을 때, 마치 저승사자인 줄 알았다.     


“앗. 누나. 저기 그게 아니라… 재민이랑 공기 하려고 공깃돌을 찾다가… 미안해.”     

누나는 연두색 감 열매 다섯 알을 ‘똑’ 땄다. 그러고는 내 손에 쥐어주며 ‘씩’ 웃었다. 꿀밤이라도 한 대 맞을까 안절부절못하던 재식이 형은 한숨을 돌리며 누나에게 말을 건넸다.     


“누나는 아빠가 다시 돌아와서 좋아?” 누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형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오늘 진 사람이 내일 집에 올 때 책가방 들어주기야.”

감 열매 다섯 알을 받아 든 내가 형과 누나에게 내기를 걸었다. 

“좋아. 대신 지고 난 다음에 가방 안 들고 도망가면 죽는다아.”


형과 누나는 순순히 내기를 받아들였다. 그러고 난 뒤 우리 셋은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른 채 감나무 그늘 밑에서 오후를 보냈다. 내기의 승자는 연이 누나였다. 꼴찌 결정전에서는 내가 졌다. 나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진 것이 분해서였을까, 형과 누나의 가방을 들 생각을 하니 눈물이 차올랐다.      


형은 우는 나를 보더니 놀리며 달아났다. “남자가 쪼잔하게 그거 졌다고 우냐. 공기 해서 졌다고, 운대요, 운대요~ 아이 울보, 아이 울보~”      


“잡히기만 해 봐. 죽는다아.” 뜀박질이라면 당할 자가 없는 형이었다. 멀리 내달린 형은 나와의 거리를 확인한 뒤 허리를 숙이고 가쁜 숨을 골랐다. 그 광경을 보던 영지 누나는 배시시 웃으며 감나무를 가로질러 집 안으로 들어갔다.     

*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 호선네 산기슭에 겨우 걸쳐 있었다. 영지 누나네 솥뚜껑에선 부연 김이 스멀스멀 올라가고 있었다.      

“영지야, 밥 먹어라.”

영지누나 할머니는 쪼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누나를 보며 밥 먹는 시늉을 해 보인다. “아버지두 얼른 와 진지 드시라구 혀.”

하지만 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머니는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다가와 누나의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이것아. 니 애비한티 밥 먹으라고도 못 햐. 그리 말을 안 들어 처먹어서 어따 써먹어.” 할머니는 이번에는 누나의 등짝을 호되게 쳤다. 그때, 방 안에서 누나의 아버지가 나왔다. 미닫이문을 여는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냅둬유. 저라고 맴이 좋겄슈. 다, 나 땜이 그런 건디, 뭐라고 하지 마셔유.”     

그의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화를 참지 못해 씩씩거리던 누나는 아버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을 밀치고 홱 밖으로 나갔다. 그날 누나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     

‘길이 없다. 어디고 내가 갈 길이 보이지 않는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겁이 난다. 지난번 끔찍한 사고가 다시 떠오르려고 한다. 내 다리를 치고 쏜살같이 달아난 트럭의 헤드라이트 불빛. 어둠이 온다. 다리가 점점 아프다. 아무 곳이나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다. 여전히 길은 안 보인다. 세상이 싫고, 사는 것도 싫다.’    

 

소녀 영지는 어느 시골 비탈길을 걷고 있었다. 깜깜한 밤인지라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맞은편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누구여?” 영지 앞에 웬 사내가 나타났다. 서 있는 물체가 사람인 걸 확인한 영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즈으기…나, 아으…어엉”

“잉? 시방 뭐래는 거여? 뭔 소린지 통 못 알어들겄네. 너, 말을 할 줄 모르냐?”     

영지는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그려? 근디 지금 워디 가는겨? 이 동네 아는 건 아닌 거 같은디?”     

사내의 이번 물음에 누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내도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난감한 표정이었다.      

“거시기, 어디 갈 디도 없는 거 같구먼. 사방이 깜깜한디 내 따라 갈려?”

“…….”     

어디든 가서 눕고 싶었다. 이윽고 사내는 앞서 걷기 시작했고, 영지는 서너 발자국 뒤에서 절룩거리는 다리를 끌면서 따라갔다. 풀벌레가 성가시게 귀를 찌르는 초여름 밤이었다. 밤은 깊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마음속에서 나쁜 감정들이 생기면 말이나 행동으로 즉각 표출하지 말고 그냥 꿀꺽 삼켜봐휘파람을 불거나 재미있는 말을 떠올려보는 것도 효과가 있어나쁜 감정을 꿀꺽 삼키고 나면 기분 나빴던 이유도 잊게 돼충동적인 감정은 잠깐 왔다가 사라지게 되어 있거든그러면 엄마도 상처받지 않고너도 엄마에게 덜 미안하잖아그렇지? *     


*강금주 『사춘기로 성장하는 아이 사춘기로 어긋나는 아이』(루미너스, 2018)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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