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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미스트 Apr 18. 2022

은퇴 예산이 생각보다 줄어들었다.

무소속 생존기

   섭씨 19도

   미세먼지 23, 초미세먼지 13

   자외선 지수 4(좋음)

   습도 33%


   한가로운 평일 오후, 실내에 있기 정말 아까운 날씨다. 바쁜 일을 잠시 내려두고 산책을 나왔다. 따뜻한 햇볕과 오랜 걸음으로 더워진 몸을 봄바람이 적당히 식혀준다. 어제까지 비가 와서인지 시냇물 유량도 많고, 물소리가 평소보다 명랑하다.



   내 주변에 걷는 분들의 거의 대부분은 대개 장년층, 노년층이었다. 아마도 현재는 일을 하지 않는 은퇴한 분들일 것이다. 혼자서 여유 있게 걷는 분도 있었고, 벤치에 나란히 앉아 무심한 듯 즐거운 듯 대화를 나누는 분들도 있었다. 다들 은퇴 이후 생긴 자유시간을 처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에게도 갑자기 생겨버린 자유시간을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작년 5월 어느 날, 즐거웠던 봄나들이를 마치고 집에서 쉬는 중이었다. 늦은 시간, 아이 담임선생님의 전화가 왔다. 아이가 학교 밀접 접촉으로 2주 자가 격리를 해야 한다는 연락이었다. 나와 와이프는 격리 대상은 아니었지만, 나는 2주간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기로 했다.


   사업과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연락한 이후, 내 전화기는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조용해졌다. 보통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가족과 저녁을 먹고 조금 쉬다가 씻고 자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이런 일상에서 잠시 직업이 사라지니 갑자기 나에게 없던 시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조금 피곤하다 싶으면 바로 누워 쉬었고, 매일 낮잠도 조금씩 잤다. 그래서인지 평소 나를 괴롭혔던 스트레스성 통증들이 사라졌고, 얼굴이 편안해 보였고 안색도 밝아졌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자극적인 음식들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나고 보니 아이의 격리기간 2주 동안 배달음식을 한 번도 시켜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뤄두었던 책도 마음껏 읽었고, 좋아하는 EBS 방송(세계 테마 기행, 한국기행, 건축 탐구 집 등)도 실컷 보고, 돈 한 푼 들지 않는 달리기 그리고 햇빛을 매일 즐길 수 있었다.



   남아도는 시간을 써야 하니 요리도 크게 번거롭지 않게 느껴졌다. 간소한 집밥 덕분에 뱃속이 편안했고, 식재료를 사다 직접 요리를 하니 생활비도 꽤 절약되었다. 무슨 이유인지 식사량은 전보다 줄었고, 금세 배가 불렀다.



   밥을 해 먹고 바로 설거지를 하니 그릇도 몇 개 쓰지 않아, 지금 보다도 절반 이하로 줄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비움을 몇 차례나 진행해서 그릇이 별로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옷도 별로 없지만 은퇴를 하면 그나마 더 없어도 될 것 같다.




   얼마 전 아이의 코로나 확진과 연이은 나의 확진으로 한번 더 2주를 쉬게 되었다. (나는 목이 많이 아팠지만, 아이는 이틀 열만 나고 지나가서 참 다행이었다.) 작년에 2주간 느꼈던 생각을 이번에도 똑같이 느끼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회사의 한 달 매출의 절반이 날아갔지만, 그 손실이 아깝지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의 부자가 되어 여유를 즐기고, 적게 가져도 살아갈 수 있는 가벼움을 다시 느끼게 되어 좋았다.



   그러고 보면 은퇴 예산을 실제보다 높게 잡은 것은 아닌가 싶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적은 생활비와 살림 규모로도 가능할 것 같다. 배낭여행자가 짐을 점차 줄여나가는 것처럼, 2주간 은퇴 리허설을 하면서 없어도 되는 것들이 또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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