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개인의 시대
나의 폰에는 상대와의 관계로 전화번호가 저장되어있지 않다. 아버지, 어머니, 와이프 등이 아닌 모두 실명으로만 번호를 저장한다. 이유는 그 사람을 나와의 관계로 기대하거나 예상하지 않고, 독립된 객체로 바라보고 싶기 때문이다.
관계에서 기대하여, 그들이 나에게 베푸는 무언가를 당연하게 여기고 싶지 않고, 또 그들이 나와의 관계에서 부릴 수 있는 이기심의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저 하나의 독립된 사람으로 각자 존재하는 게 서로 가장 바람직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밑바탕이 아닌가 싶었다.
마침 최근 읽었던 송길영 박사님의 '시대예보'에도 이런 말이 나왔다.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영국 작가 새뮤얼 존슨의 표현을 인용하여 '상호허겁 相互虛怯 (mutual cowardice)이 인간을 평화롭게 만든다'라고 말했습니다. 서로를 적당히 두려워하는 관계가 생태계에 최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저 사람은 갈 곳이 없다.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신호가 보이면 경쟁 서열 집단에서는 조심성이 사라집니다. 상대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선다는 이야기와 같기 때문입니다."
뒤돌아 보면 적당히 거리를 유지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는 변질되지 않았다. 그래서 형이라서, 동생이라서, 부모라서, 친한 형님이라서, 아끼는 동생이라서 일단 깔고 들어가는 또 뭔가를 당연하게 기대하는 태도가 건강한 관계 형성에 방해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부모형제는 한때 가족이었던 사람들이다.
이제는 더 이상 내 가족이 아니다. 성인으로서 독립하여 자기 밥그릇을 분리했거나, 자기 가정을 새로 꾸렸다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지금 나의 가족은 와이프와 아들이고, 언젠가 아들이 독립을 하여 떠난다면 아들도 더 이상 내 가족이 아니게 될 예정이다. (가족이 아니라고 해서, 부모형제가 아니란 말도 아니다.)
차에서 듣는 음악, 방송, 그리고 와이프와 나누는 이야기는 아무런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뒷좌석 어린 자식의 귀로 들어가 그대로 입력이 된다. 그래서 어렸을 적에는 부모와 비슷한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공유하게 되지만 학교에서 부터 사회화가 시작되고 나면 조금씩 그리고 갈수록 달라진다.
각자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신의 부모 밑에서 자라는 시대와 환경, 내가 내 부모 밑에서 자라는 시대와 환경, 그리고 아들이 자라는 지금의 환경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모든 게 달라서 서로 전혀 상관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들이다.
이렇게나 다른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꾸 하나로 묶는다. 비슷한 듯 전혀 다른 사람들이 상호허겁 마저 없다면 갈등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나중에 독립한 개체가 되었는데도 서로 놔주지를 않는다.
그래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어느 시점이 되면 벗겨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이제 나는 부모형제와 가치관은 물론 정치성향이나 경제관념 등의 살아가는 방식 모두 다르다. 부모형제의 집에 가도 내 집처럼 편하지 않다. 대신 경계를 인지하고, 서로 깊게 상관하지 않을 자유를 모두 갖길 바란다.
전화와 문자가 올 때마다 폰에 뜨는 이름을 확인한다. 나에게 오는 전화와 문자의 발신자 표기는 상호허겁을 기억하라는 반복 시그널이 된다.
그럼에도 나는 아들에게 수시로 선을 넘고 있어 매우 우려스럽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 뒤에는 특별히 'ㅇㅇㅇ 님'이라고 존칭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