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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미스트 Apr 26. 2024

아흔이 된 ‘워리어’

   오랜만에 큰아버지를 뵈었다.

   아흔에 가까운 노인이 되셨지만, 여전히 정신과 언변이 또렷하셨다. 잦은 접촉사고로 운전은 그만두셨지만, 오토바이와 버스를 이용해 시골에서 시내로 병원을 다니신다.


    사위가 진료하는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옆 건물에 있는 시장 돈가스집에서 점심을 드신다. 가게 주인에게 대수롭지 않게 '내가 저번에 먹던 거 그거 주소'라고 말씀하시면, 주인은 '00 돈가스 드셨어요'라고 하고 이내 음식을 내온다.


   시장표 줄무늬 셔츠, 얇은 패딩 조끼, 오래되어 보이는 바지와 벨트, 20년은 넘어 보이는 시장표 힙색에 무심히 지갑과 휴대폰을 넣고, 조금은 허리가 굽은 자세로 세상의 시선에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하다. (그래서 내 눈에는 매우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어렵게 농사지으며 모은 땅 하나씩 팔면서 넉넉하진 않지만 부족함 없이 사신다. 한 명은 이혼했지만, 뭐 형 누나들 그리고 며느리 사위도 다 잘된 편이다. 사업, 교사, 고위공무원 그리고 한의사. 심지어 효자 효녀들이다. 큰어머니와도 잘 지내신다.


   "온 우주에서 나만 혼자인 것 같이 고독하다."


   돈가스를 기다리던 중 큰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이다.

   슬픔보다는 덤덤함과 무심함이 묻어났다. 한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지은 투박한(?) 농부의 입에서 듣기 어려울 거란 선입견 탓인지 큰아버지의 말씀은 매우 인상적이 있다.


   "옛날에 애들 학비 못 댈까 봐 전전긍긍했던 그런 시절도 다 지나갔다."


   삶의 모든 미션을 거의 다 마치고, 이제 자기 몸하나 건사하는 것만 남은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 (큰아버지는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스물도 안된 나이에 가장이 되어 홀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하셨다.)


   그렇게 한평생 어렵게 그리고 열심히 삶의 고난에 투쟁하며 살아오셨을 텐데, 고난(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이제 다 지나간 일이 되었고 이제 끝자락에서 허무함을 마주하고 있어 보였다.


   지나고 보니 나의 전전긍긍도 다 지나갔다.

   어렸을 적에 낚시 못 따라갈 까봐 '엄청' 걱정했던 일, 시험준비에 몇 날 며칠 긴장하며 집중해야 했던 일, 회사의 밀린 급여가 언제 나올지 걱정하던 일, 창업한 회사 매출에 걱정이 떠나지 않던 일, 예상치 못한 가족의 건강문제와 병원비 등 셀 수 없이 많았던 그리고 지금도 나를 고민케 하는 일들은 어쨌든 끝났다. 그리고 끝난다.


   앞으로의 전전긍긍도 다 지나갈 것이다.


   정신을 쏙 빼놓는 바쁜 일들, 고민스러운 일들, 심지어 즐겁고 신났던 일도 다 지나가고 없다. 그런데 이런 일들에 정신 나가있을 때는 모르다가, 맹물 같은 시간이 찾아오면 허무함에 빠지는 것 같다.


   나도 그 선상에 있고,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큰아버지가 있는 곳에 서있을 것이다.


   만사의 끝이 허무함이라니, 좀 슬프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차피 모든 게 끝날 거라면, 어차피 허상이라면 눈앞에 것에 너무 연연하지 않는 건 어떨까?


   너무 내 목숨 걸어가며 싸울 일도 아니지 않을까?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건 어떨까?


   그냥 껄껄 웃으며 밥이나 맛있게 먹고, 꿀잠이나 청해 보는 건 어떨까?


   정신을 쏙 빼놓는 일이 없으면 또 불안해하는 가여운 나라는 인간.


   머리로는 지금을 살아야 한다고 하지만, 불안을 떨쳐내지 못하는 어리석은 나라는 인간.


   맹물이 제일 좋은 것을 모르는 나라는 인간.


   그냥, 대충 살어 이 새끼야 ㅋㅋㅋ

   괜찮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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