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놀이를 좋아하는 도치도치상
도치도치상은 사랑놀이(어른들에게 허용된 놀이)를 무척 좋아한다.
도치상에게 사랑놀이는 몸의 대화다. 서로의 눈빛, 손과 피부, 생식기까지 어우러지는 몸이 하는 대화라서 도치상은 사랑놀이가 그렇게 좋다. 사랑놀이가 역겹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행위 자체만 보면 땀과 타액, 교성이 뒤섞인 본능적 행위라고도 볼 수 있으니까 그런가 보다.
역겨움이라는 감정은 신비롭다. 프렌치 키스와 상대의 침을 삼키는 행위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고 알랭 드 보통이 그랬다. 키스는 서로의 혀를 비비고 침을 교환한다. 그러나 상대가 뱉어놓은 침을 삼키는 사람은 없다. 결과적으로 프렌치 키스나 남의 침을 삼키는 행위는 크게 다를 바 없는데도 말이다.
키스는 왜 로맨틱하고 뱉어둔 남의 침을 삼키는 행위는 역겨울까? 상징성이 뒤에 있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받아준다는 상징성이 키스 이면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알랭 드 보통은 강조했다. 행위 자체가 주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키스는 로맨틱하게 느껴지지만 뱉은 침을 삼키는 행위는 역겹다고 느낀다. 역겨움과 로맨스는 한 끝 차이인 셈이다.
도치상은 사랑놀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사랑놀이는 땀과 타액으로 범벅이 된 두 동물의 교미가 아닌 두 인격이 정신적으로 교감하는 행위다. 교감이라는 상징성에 더해서 수용적 경험이 도치상을 황홀하게 한다. 도치상은 고독감을 느낄 때가 있지만 (홀로 와서 홀로 가는 게 인생이라고 하지 않던가) 도치상은 사랑놀이를 통해서 온전히 받아들여진다는 경험을 한다. 도치상은 그래서 사랑놀이가 에로틱하면서도 로맨틱하면서도 전 인격적(whole person)이라고 느낀다.
도치상에게 사랑놀이는 완벽함을 과시하는 행위가 아니다. 도치상은 두 사람이 하나 되어 완벽해지는 것이라는 논리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두 사람일 뿐이다. 서로의 반쪽이 결혼해서 하나가 된다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두 사람이 합체로봇은 아니지 않나.
오히려 사랑놀이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서로의 약함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완전성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상대방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행위다. 약함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사랑의 행위다.
감추어둔 육체를 서로에게 개방할 때 부끄럽다. 상대방이 있는 그대로의 원초적 모습, 부족한 육체를 받아들여줄까 고민하면서 도치상은 불안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도치상은 사랑놀이를 통해서 발가벗겨진 부끄러움, 완전하지 않은 육체, 불안감, 도치상의 인격이 표현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아주는 행위로 경험한다.
벌거벗은 도치상의 연약한 모습은 모찌상에게 아무런 판단 없이 받아들여진다. 이런 의미 위에서 사랑놀이는 도치상에게 흥분과 환희를 가져다준다. 그러고 보면 사랑놀이는 단순한 쾌락을 가져다주는 놀이는 아닌가 보다. 육체적인 행위이지만 존재론적인 의미를 지니는 역설적인 행위이니까.
그리고 사랑놀이의 결실로 콩콩이가 생겨났다. 도치상은 당분간 사랑놀이를 못하겠지만 모찌상과 도치상 앞에 도착할 콩콩이를 미소 지으며 기다리는 중이다. 두 사람의 사랑놀이가 한 사람을 창조하는 행위라니. 콩콩이를 실제 만난다면 도치상은 감격과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이라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