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과 우울함의 공간에 대한 이야기
죽음의 집은 명시적으로 죄인들이 갇혀 있는 감옥을 이야기 한다. 복역이라고 명명되어 있는 일정 기간을 지나야지만이 나올 수 있는 그 곳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죽음의 집의 기록'은 감옥에 가게 된 한 귀족이 보는 감옥 안의 이야기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실제로 옴스크 감옥에 복역을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자신의 기억들을 재편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이 책 안에서 사람들이 나뉘어지는 주된 기준은 그 사람이 귀족인가 혹은 평민인가이다. 귀족도 죄를 지으면 결국은 다름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서 귀족과 평민이 구분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귀족'이라는 존재는 한편으로는 탈감옥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탈감옥적이지 못한 것이다.
어쨋든 귀족은 그곳에서도 평민과 함께 함께 섞이지 못한다.
한편 섞이지 못하는 것은 귀족과 평민 만이 아니다. 폴란드인, 코카서스인, 레즈킨인, 체첸인, 다게스탄 타타르인과 같이 다양한 인종과 지역의 차이는 사람들을 갈라 놓는다.
이런 모습은 감옥의 안밖을 구분하지 않고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감옥, 그곳 역시 또 하나의 작은 사회인 것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도스토예프스키는 실제로 그 자신이 감옥에 갇혔다. 시베리아 한 벌판에 있던 그 감옥은 그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겠지만 동시에 그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그가 작가로서 필요한 역량 즉 사람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실제적인 경험들은 이후에 그의 글에 큰 씨앗이 되주었다.
(결국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 플롯을 글로 엮어내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작가들의 글쓰기 방식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한편 죽음의 집 안에서 나오는 많은 주인공들을 보면 죽음의 집 안에서 고통을 받는 사람은 비단 죄수만은 아닌듯 비춰진다. 죽음의 집을 총 관리하는 소령 역시 검열을 나온 장성의 눈에 들기 위해 스스로와 죄수들을 모두 괴롭힌다. 감옥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은 중 밝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그곳에도 삶은 있다.
죄수들이 의욕을 만들고 준비하는 연극, 그리고 귀족의 특식에 대한 평민들의 불만, 또한 감옥을 관리하는 소령에게 항의를 하기로 한 평민 죄수들의 움직임까지... 이 모든 것은 평범한 삶과도 프레임적으로는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혹시 결국은 마지막에 '죽음의 집의 기록'의 주인공은 형을 마치고 자유를 찾게 되지만 결국은 감옥이라는 공간을 그 자유로 인해 선과 악이라는 프레임으로 정의하지는 않았다. 단지 감옥에게 남은 수식어는 '죽음' 뿐이다. 철창 밖의 사회와 비슷하지만 사람들이 죽어 있는 듯이 움직이는 모습이 도스토예프스키가 느꼈던 감옥의 모습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