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재은 Aug 06. 2021

독일인들을 울린 미나리, 그리고 윤여정


미나리를 보고왔다. 뒷북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사는 독일 뮌헨에선 이제 막 상영하기 시작했다. 더빙을 선호하는 나라답게 웬만한 극장은 모두 독일어 더빙판이었다. 차마 배우 윤여정의 섬세한 목소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음성에서 전해지는 감정을 어찌 포기하리. 


겨우겨우 오리지널 사운드와 독일어 자막을 제공하는 극장을 찾았다. 좌석이 40개 밖에 안 되는 소규모 극장이다. 극장 입구는 좁고 계단을 따라 조금 내려가야 했다. 작은 키오스크에서 병으로 된 음료와 과자, 하리보 등을 판매한다. 저녁을 부실하게 먹어 배고팠던 터라 감자칩을 하나 샀다. 상영 시작 시간은 저녁 8시. 나와 독일인 친구는 저녁 7시 50분 경에 도착했다. 각자 음료와 감자칩을 들고 극장에 들어갔다. 정말 작고 아담했다. 우리가 예매한 좌석은 맨 뒤다. 자리를 잡고 앉아 열심히 갑자칩을 먹으면 기다리는데, 7시 57분이 되도록 사람이 아무도 안 들어온다. 보통 8시 시작이면 그 전에 대부분 들어오는 게 내겐 익숙한 영화관의 풍경인데. 


8시 직전이 되어서야 우르르 들어온다. 나는 순간 친구에게 "우리 제대로 들어온 것 맞지?"라고 속삭였다. 예약이 꽉 찼길래 뮌헨에 사는 한국인들이 오리지날 사운드 들으러 오는구나-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 한국인은 나밖에 없었다. 또, 그동안 내가 봐온 한국 문화에 관심을 보인 연령대는 대부분 10대, 20대였는데 이 자리에선 나이가 지긋한 분들의 지분이 90%다. 배우 윤여정의 효과인걸까? 아니면 기생충으로부터 이어지는 한국 영화에 대한 기대감? 


 



영화가 시작됐다. 배경은 미국의 한 시골. 모든 배우의 연기는 빠짐없이 탄탄했다. 딸 앤과 아들 데이빗을 연기한 어린 배우들 역시 미국에서 자란 한국 어린 아이 연기를 놀랍도록 잘해냈다. 특히 데이빗이 바나나 껍질을 벗기는 씬은 정말 명장면이다. 그 부분에서 극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빵' 터졌다. 자신의 팔뚝만한 바나나를 먹겠다고 열심히 껍질을 벗겨내는 데이빗의 모습은 왠지 허허벌판에서 무리수를 두며 농사를 시작한 그의 아버지와 겹쳐보이기도 했다. 


순자(윤여정 분)와 모니카가 만나는 장면에서 나는 그만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다. 눈물을 꾹꾹 참으며 엄마를 맞이하는 딸의 모습에서 나와 엄마가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독일로 떠나올 때마다 나는 그녀와 똑같은 표정으로 뒤돌아선다. 엄마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엄마 마음이 더 아플 것 같아서. 그런 순간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내 왼편에 앉은 독일인 아주머니가 그런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셨다. 
 



영화가 후반부로 흐를수록 배우 윤여정의 연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 허공을 쳐다보며 걷는 그녀의 모습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아프고 아름다웠다. 그때 내 옆자리에 있던 독일인 아주머니께서 훌쩍이기 시작하셨다. 허공을 응시한 채 목적없이 걷는 순자를 데이빗이 애타게 불렀다. 데이빗은 곧 할머니를 잡기 위해 뛰기 시작했다. 두 칸 앞에 앉은 아주머니 두 분이 이내 손수건을 꺼내 코를 움켜쥐셨다. 데이빗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깔깔거리고 웃던 젊은 청년 두 명도 숨죽이고 그들의 연기를 감상했다. 작고 허름한 극장 안은 미나리의 따뜻한 배경 음악과 훌쩍이는 소리로 꽉 찼다. 


 제이콥과 데이빗이 미나리밭에서 대화를 나누며 영화는 끝났다. 나는 몸을 숙여 의자 밑에 흘린 과자를 줍기 시작했다. 보통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하나 둘 움직이기 마련이니 얼른 치워야겠다 생각했다. 부지런히 치우다 잠깐 고개를 들었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엔딩 크레딧에서 흘러나오는 '비의 노래'를 감상하고 있었다. 미나리의 진한 여운을 쉽게 떨치고 싶지 않은 듯 누구도 일어서지 않았다. 핸드폰을 켜는 사람도, 겉옷을 주섬주섬 입는 사람도 없었다. 본의아니게 과자 줍는 소리로 방해를 한 것 같아 머쓱했다. 

 

그들의 감정선을 자극한 건 대체 무엇이었을까. 배우 윤여정의 그렁그렁한 눈빛에서 그들은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녀가 심은 미나리가 잘 자란 모습을 보며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비의 노래'를 부르는 배우 한예리의 목소리는 어떻게 그들을 꽁꽁 묶어둔걸까. 모녀가 만나는 장면에서 눈물을 쏟은 나를 그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듯, 나 역시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지점이 있는거겠지. 이런 생각을 하며 엔딩 크레딧은 끝이 났다. 누구 한 명이라도 붙잡고 영화의 감상평을 묻고 싶었는데 밤이 늦어서인지 모두 빠르게 퇴장한다. 


 그때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말했다. 


 "Die Oma war die Beste(할머니는 최고였어)." 



매거진의 이전글 독일에선 소가 사람을 구경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