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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N Sep 19. 2017

'노포(老舗/老鋪)'를 생각하다

언제부턴가 퍼지기 시작한 '유서 깊은 맛집'을 뜻하는 단어

언어라는 건, 무수히 많은 상호작용 속에서 변화를 겪는다. 사람들끼리 사용하는 가운데서 문법이나 단어가 바뀌기도 하고, 외국어에서 영향을 받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흐름을 억지로 바꾸는 건 어렵다고 보는 입장이다. 


특히, 현대 한국어에는 많은 일본 유래 단어들이 들어있고, 이제는 유래조차 잊혀진 단어도 부지기수다. 예를 들어, 사회, 방송, 철학 등등 개념어는 대부분 일본에서 전래된 말들이다. 이런 것들을 다시 '한국어화'하는 게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의미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때로는, 들어도 바로 감이 오지 않는 단어가 있을 때가 있다. 한국어식 조어법과 큰 괴리가 있을 때 주로 발생하는 일로, 법률 용어에 유난히 많은듯 하다. 


 '명도(明渡) 소송' '일응(一應)' '언도(言渡)하다'와 같은 말들이다. 아래는 각각의 단어가 쓰인 예문이다. 최근까지도 법정 안팎에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명도'가 쓰인 예


'일응'이 쓰인 예


'언도'가 쓰인 예

이 단어들은 일상적으로 거의 쓰이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법률가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레 사용되고 있다. 한자를 봤을 때도 의미가 딱 와닿지 않는다. 이는 일본어에서 한자를 뜻으로 읽는 단어(훈독訓読み)를 그냥 한국식 한자 읽기(음독, 音読み)로 바꿔서 읽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명도'는 일본어 '비워서 넘기다'는 뜻의 '明け渡す'에서 온 말이다. 비우다란 뜻의 '아케루'와 넘기다란 뜻의 '와타스'가 합쳐진 단어다. 한국어에선 '밝을 명'을 비운다는 뜻으로 거의 쓰지 않는다. 그래서 의미가 불명확해지고 해석을 한 번 더 해야한다.


'일응' 역시 '일단, 우선은'이란 뜻인데, 일본어에서는 자주 쓰이나(이치오,いちおう) 한국어와는 거리가 있다. '언도'는 '言い渡す'란 일본어로, '위로부터 명령을 내리다'는 의미가 담겼다.


이처럼 일상어와 괴리된 일본어 표현은 좀 더 쉬운 말로 바꾸는 게 맞다고 본다. 굳이 어려운 말로 이해하는 데 시간을 들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 여기저기서 맛집과 관련해 자주 접하나 이상하게 어색함이 가시지 않는 단어가 있다. '노포(老舗・老鋪)'라는 말이다.


 '늙을 로'자와 '가게 포'자가 합쳐졌으니 오래된 가게라는 의미는 한자를 보면 대강 알 수 있다. 하지만 한자 없이 한글만 보면 여전히 바로 와닿는 말은 아닌듯하다. 카톡으로 주위에 물어보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지인도 몇 있었다.


쓰이는 예는 다음과 같다. 블로그 제목과 기사를 중심으로 퍼왔다.


이 말이 과거부터 쓰였던 건지 확인하기 위해,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를 활용해 옛날 신문을 검색해봤다. 동아일보 1945~1999년까지를 범위로, 노포라는 단어를 넣었다. 검색 결과 내 첫 페이지는 현재 사용되는 의미의 노포라는 단어가 눈에 띄지 않았다.


'노포' 검색. 출처: 네이버라이브러리

가장 먼저 노포라는 단어가 포착된 건 1962년 10월 30일자 파리 미술과 관련한 기사에서다. 그 외에는 주로 부산에 있는 노포동 얘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현재 주로 쓰이는 것과 의미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음식점'이 아니라, '오래된 상점'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같은 의미로 노포라는 단어가 쓰인 기사가 80년대에도 있었다. 이번에는 가게보다 조금 더(?) 큰 기업이라는 의미다.


석유 거대기업 '엑슨'을 '노포'로 표현한 기사

이 시기 오래된 음식점을 노포로 표현한 기사는 1993년 7월 29일자 기사 딱 하나였다. 오래된 추탕집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노포로 소개되는 추탕집

결론적으로 해방후부터 90년대까지 '노포'라는 말은 익숙한 말이 아니었다. 신문에서조차 쉽게 볼 수 없던 말이었고, 그나마도 '맛집'에 한정된 지금과 달리 상점, 기업 전반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그런데 검색 기간을 좀 더 옛날로 돌리면 결과가 좀 더 자주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의미는 역시 음식점이 아니라 상점, 기업 전반이다. 일제시대에는 비교적 흔하게 들렸던 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부터 쓰이던 한자일 수도 있어, 이번에는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봤다. 


조선시대에 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조선왕조실록에는 전혀 실려있지 않은 단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노포라는 건 일본어 한자를 한국어 발음으로 옮겨온 단어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일본어에서 노포는 老舗라고 쓰지만, 발음은 전혀 딴판인 '시니세しにせ'다(물론 ろうほ로호라고도 읽는다지만 오히려 이쪽이 훨씬 예외적이다). 이런 걸 '아테지(当て字)'라고 한다. 먼저 발음이 있고 한자를 나중에 갖다 붙이거나 한자가 뜻은 보여주지만 원래 발음은 전혀 딴판인 경우도 해당된다. 시니세가 그러하다. 


'시니세'라는 말이 먼저 쓰이고 있었고, 뜻을 쉽게 하기 위해 한자를 갖다 붙인 것이다(물론, 이렇게 되면 읽기 위해서 한자와 읽는 법을 따로 외워야 한다. 최근에는 많이 줄었다고 하나 여전히 이런 단어가 남아있어 외국인 학습자를 피곤하게 한다).


'시니세'라는 말의 어원은 다음과 같다. 어원사전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동사 '為似す・仕似す(しにす,시니스)'에서 유래해 '비슷하게 하다''흉내내다' 등의 의미에서, 에도시대에 '가업을 끊기지 않게 잇는다'는 의미가 생겨, 오랜 기간 장사를 해 신용을 얻는다는 뜻이 됐다. 


당연하게도 일본어에서 역시 음식점만에 한정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오래된 기업 등을 묘사할 때도 종종 쓰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니세 상장기업'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는 '노포'라는 말이 '오래된 맛집'에만 주로 쓰이게 되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일본 여행을 한 맛집 전문가(?)나 여행객들이 오래된 일본 음식점에 붙어있는 노렌(천)이나 간판, 광고를 본 게 하나의 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한국어에 '오래된 가게'에 해당되는 단어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던 차에, 일본에서 발견한 단어를 그대로 차용한 게 아닐까 하는 가설이다. 굳이 한자를 바꾸지 않아도 어느 정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점도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아래는 노포라는 단어를 넣은 일본 음식점과 도시락 광고.



예를 들어, 요리사이자 맛집 전문가로 유명한 박찬일씨의 아래 책 부제는 '노포기행'으로 돼있다.


(참고로, 노포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책을 검색해보면 초기에는 주로 일본과 관련한 얘기가 나오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오래된 맛집을 다룬 책이 중심이 된다)



굳이 '노포'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는 데에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만약 나름대로 언어적 생명력이 있다면 한국인들의 어색함을 이겨내고 살아남을 것이다. 흥미롭게 지켜보고 싶다.


※브런치 태그 검색어에도 아직 '노포'라는 말이 실려있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완전히 자리잡지 않은 단어라고도 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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