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걸로 전화하지 마세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가 와서 연정을 달에 실어 보내는 노래.
사실 내 주변에서는 달달한 사랑의 말 보단 그런 걸로 전화하지 마세요.라는 밈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나도 처음에 들었을 때는 간질간질한 감상보다는 오글거린다는 말을 먼저 했던 것 같다. 그래도 이 노래를 꺼낸 이유는 달이 떴기 때문에 전화를 하고 싶었던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사랑엔 여러 형태가 있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모두 그 테두리 안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가족과 친구에 대한 사랑은 겪어봤어도 연인에 대한 사랑은 겪어보지 못했었다. 학창 시절 내내 친구들과 연필을 돌려가며 진실게임을 할 때 조차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에 없어서 부정만 했던 게 나였다. 가족과 친구들도 사랑은 하지만, 딸은 원래 무뚝뚝하지 않나. 달이 떠서 전화를 하고 꽃이 피어서 사진을 보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도 무미건조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같은 반 애가 은근슬쩍 티를 내도, 좋아한다고 고백해도 별 감정이 없어서 이유도 모른 채 미안하다는 말만 번복했었다.
어른들은 크면 나아질 거라고 했고 친구들은 연애 얘길 할 때마다 내 지향성을 추측하길 반복했다. 학창 시절엔 공부 외의 문제엔 해탈한 상태였기 때문에 알아서 추측하라고 내버려 두곤 했다. 대학을 가고 직장을 다니며 어른이 된다고 해도 내 마음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실 이대로 평생 연애를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기도 했다. 그 관계 자체가 나에게 의미 있다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하지만 원래 로맨스라는 건 예측하지 못하게 찾아오곤 한다.
여느 영화 드라마 소설의 로맨스가 죄다 뻔할 뻔자인 것은 실제로도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엄청 친한 친구였다. 오래 알지는 못했어도 깊은 관계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마트에 갔다가 한 달도 더 전에 그 사람이 좋아한다고 말했던 캐릭터가 그려진 컵을 샀다. 어떤 생각이 있어서도 아니고 당연하게 사다 줘야겠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집에 와서 3천 원짜리 컵을 포장하고 리본을 묶으며 컵을 주기 위해 그와 약속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컵을 포장해 가방에 넣고 가방과 어울리는 옷을 골라 걸어놓고, 그에게 연락하기 위해 휴대폰 타자를 치다가 나 이 사람 좋아하네? 하고 깨달은 것이다.
알게 된 순간부터 감정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왕에게 반역하기까지 숨죽이고 있다가 디데이가 된 날 터져 나와 싸우는 기사들처럼. 그럼 왕은 내가 여태까지 이 싸인을 왜 몰랐지? 한다. 나도 그랬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걸 몰랐다고?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사랑하는 마음 하나도 몰랐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의미 없이 몇 시간 동안 하던 통화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 모양, 색깔, 입은 옷이 다 멋있고 예뻐 보였다. 문자 하나에 답장하기도 오래 걸렸다. 말을 고르고 골라했다. 전 날 저녁에 먹고 싶다고 했던 과자를 다음 날 저녁에 사다 주곤 했다. 그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향수를 사서 약속이 있는 날에 뿌리고 나갔다. 가끔은 향수가 겹치기도 했는데 그러면 우리 같은 향 난다고 웃으며 말했다. 좋아하는 캐릭터나 색이 들어간 컵을 사다 주기도 했다. 내 시작이 컵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평소에 컵을 옆에 두고 물을 자주 마시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랬다.
나름대로 한다고 했어도 이 이상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짝사랑도 사랑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궁여지책으로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고 죽을 때가 된 것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나도 어이없지만 아니라고, 그런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몇 시간씩 고민상담을 했다. 그동안 내내 들어주는 입장이었는데 말을 하려니까 낯간지럽고 어색했다. 연애상담을 할 때 나에게 술술 말하던 친구들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친구들의 조언을 들었고 내가 내린 결론은 아무것도 듣지 말고 나랑 상대만 생각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도 꾸준히 약속을 잡았다. 어느 날은 전화를 하기도 했다. 달이 예쁜데 보고 있냐고. 같이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달이 떴다고 전화를 한 거다. 사실은 달도 컵도 구실이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좋아한다는 말이다. 나츠메 소세키가 한 번역을 그대로 되감으면 된다. 난 그 번역이 돌려 말하는 걸 좋아하는 일본의 특성상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기가 좀 그러니까 괜히 달 얘기를 꺼낸 거라고 생각한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실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나. 달은 그런 명분 중 하나인 거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결혼이 이루어짐의 기준이라면, 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 걸까?
하지만 계속 달 이야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컵을 구실로 연락을 잡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좋아하는 걸 알게 됐던 것처럼 난 어느 날,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우리 사이의 구실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달이 예쁘다고 하는 대신 사랑한다고 말하기로 했다. 상대방이 모르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만나지 않고 하는 고백이나 이별을 싫어했는데, 막상 내가 그 상황이 되니까 도저히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여느 때처럼 전화해서 말했다. 오늘은 달이 예뻐서, 컵을 사서 전화한 게 아니라 네가 보고 싶어서 전화한 거라고. 좋아한다고. 예의도 무드도 없는 고백이었지만 상대방은 알고 있었다고 웃으며 받아주었다.
그때부터는 더 이상 달을 핑계 삼지 않았다. 달이 예뻐서 전화를 하는 대신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 달이 예쁘면 함께 보자고 했다. 좋아한다던 컵을 무심코 사서 주는 대신 함께 고른 컵을 같이 썼다. 손을 잡고 걸었고 맛있는 건 같이 먹었다. 대부분 하는 것만 보면 친구랑 하는 것과 별 다를 게 없어 보였지만 적어도 나는 달이 아니라 그에게 예쁘다고 말해줄 수 있어서 좋았다.
지금은 달을 핑계로도 전화하지 못한다.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는 사이가 됐다.
그래도 달을 보면 그 사람이 떠오를 때가 있다. 예전엔 매일 저녁마다 뜨는 달을 보면 꼭 그 사람 생각이 나서 연락을 했었다. 사실 달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계속 그 사람의 생각만 하고 있어서 그랬던 거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이후로도 몇 번의 연애를 했고 그들에게도 달이 떴다며 전화를 하기도 했지만 간혹 달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은 그 사람이다.
달이 예쁘다고 전화를 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사람. 그 덕분에 내 미래는 어릴 적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의미 없던 것을 의미 있게 해 준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좋아할 수밖에 없다. 그는 나에게 딱 달 같은 의미가 되었다.
종종 소식을 듣고 가끔 연락하기도 한다. 짧은 연락 끝에는 항상 행복하길 바란다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어디에서든, 무엇을 하든 항상 행복하길 바라. 네가 그렇다면 나도 그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