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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렁탕과 햇반은 잘못이 없다

색연필 그림일기 -시 같은 에세이

by Eli

밤새 속이 쓰렸다 하기 싫어요,라고 말한 녀석 때문일까 오늘도 잘못된 오답을 찍어대는 녀석 때문이었을까 보일러 공사하러 온 싸장님이 어제보다 예뻐지셨는데,라고 한 희롱인지 반말인지 때문이었을까 말은 안 해도 고개를 외로 숙이며 나직이 내쉬는 누군가의 한숨 때문이었을까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 속 쓰림으로 옮겨갔나 언어는 도처에 있다 손짓, 한숨, 삐죽거림, 눈빛, 아니야 또는 무슨 상관인 데의 으쓱거림 등은 의미의 전달뿐 아니라 속 쓰리게 하는 일에도 충실하다


새벽 2시 정수기 물 한 잔 마신다 두런거리며 늦은 밤거리를 걸어가는 슬리퍼 소리가 너무 가까워 잠이 더 달아난다 닫힌 창을 다시 여미고 라꾸라꾸에 눕는다 손을 펴서 배 위에 토닥토닥 얹고 얼핏 잠들었다가 드르륵 하는 기계소리에 깬다 아, 보일러 공사 제엔장~~~ 커피 달란다 모두가 다 갑이다 공사 인부도, 학생도, 학부모도, 형제도, 부모도, 교육청 공무원도, 택배 기사도 파리 한 마리 들어와 나 잡아봐라, 약 올린다 파리를 때려잡는 건 내 비겁함의 비겁함이다 달라는 커피 두 손으로 공손히 내주고 파리를 잡아 창밖으로 버린다 속이 쓰리다 김첨지 아내만큼은 아니어도 뜨끈한 설렁탕 국물이 간절하다 포장에 담긴 사진처럼 제발, 날 달래주길 간절히 값을 치른다 설렁탕을 아, 설렁탕을 깍두기와 파 없는 설렁탕을 먹는다 배를 달래기 위해, 무언가를 달래기 위해 정성껏 한 술 두 술 의식처럼 먹는다


진하게 제대로 된 탕이라고 900원 더 붙은 설렁탕이 김첨지만 서럽게 한 건 아닌가 보다 내 의식에 정성이 부족했던가 속은 여전히 쓰리다 깍두기와 파 없는 그릇 속 설렁탕이 쓸쓸하다 빛난다는 햇반도 빛을 주지 않는구나 세상일엔 아둔하면서 이런 사물에만 민감한 때문이냐 파리는 때려잡으면서 다른 무엇은 견디는 것 때문이냐 아, 이것 때문이다 반말한 싸장님도, 누군가의 한숨도, 싹수없는 학생 때문도 아닌 허가를 미루는 교육청 공무원도, 자꾸 뭘 견뎌야 하는 것도 아닌 쓸쓸한 햇살 때문이다 설렁탕과 햇반은 아무 잘못이 없다 뱃속 쓰린 것과 함께 마음까지 달래줄 것을 기대한 어리석은 마음 때문에 쓸쓸해진 햇살 때문이다 햇살 때문이어야 한다 그래야 견딜 수 있다 설렁탕과 햇반은 아무 잘못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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