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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전화

색연필 그림일기

by Eli

리타(Rita) 언니가 전화했다. 말을 돌리던 언니는 브런치를 읽었다며 조심스레 괜찮냐고 었다. 아마도 '설렁탕과 햇반은 잘못이 없다'를 읽었나 보다.


"학원 수업 시작했잖아. 목요일까지 4일은 횡성에서 지내고 있어."

"아이구, 근데 웬 라꾸라꾸야? 엄마네 가 있는 거 아니었어? 학생들은?"


천식을 앓는 어머니 때문에 어머니 집에선 더워도 에어컨을 잘 틀지 않았다. 동생과 어머니는 다행히 더위를 잘 참았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 초에 나는 학원으로 잠자리를 옮겼다. 거주하기에 불편이 없도록 보일러며 샤워실 등을 보충하는 공사를 하고 쓸만한 라꾸라꾸 침대를 하나 들였다.


수업이 없는 오전엔 어머니집에 가거나 산책을 하거나 드로잉 연습 등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 학원 주변엔 섬강과 체육공원, 횡성 둘레길 코스와 문화원 등이 있어서 산책하기에 좋을 뿐 아니라 자연 경관도 좋아 내심 마음에 든다. 그동안 어머니를 뵈러 자주 다녔어도 어디가 어딘지 잘 몰랐는데 지금은 나만의 걷기 코스도 생기고 나만의 적막한 벤치도 있어 마음을 붙이고 있는 중이다. 어머니집에선 산책하려 해도 차를 가지고 횡성 둘레길로 나와야 했지만 학원에서는 5분만 걸어 나가면 강이 나오고 공원이 코앞이며 시장도 가깝다. 무엇보다 치킨과 자장면 배달이 된다!


일찍 일어난 날 아침엔 학원 앞 공원 벤치에서 간단히 아침기도를 하고 일기를 쓰기도 한다. 또는 장을 본 후 어머니집으로 가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한다. 수업이 끝나는 저녁엔 넓은 체육 공원을 어슬렁 거리기도 하고 섬강 둘레길을 걷거나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찜해 둔 영화를 보기도 한다. 남편의 조언대로 집생각을 하기 보다 여유를 즐기려고 노력 중이다. 며칠 전엔 14km 떨어진 횡성 호수길을 가을을 타는 어머니와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횡성에서 지낸 지 3개월 차. 혼자 누리는 저녁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다. 잘 지낼 수 있을거라던 남편의 말이 맞았다.


" 그래, 네 얘기 들으니 걱정 안해도 되겠다. 백신은 맞았니?"

" 그럼~ 언니, 걱정 하지 마. 나 잘 지내. 횡성으로 놀러와."

언니는 뭔 일복이 그리 많냐며 몸과 마음의 건강을 당부했다.


리타는 언니의 가톨릭 세례명이다. 35년 전 우리는 성당 주일학교 교사로 처음 만났다. 하이힐에 색조화장과 소위 언발란스의 유행하던 최신 헤어 스타일을 하고 나타난 언니는 Career woman이었다. 그런 언니의 모습은 사계절 내내 청바지와 과티로 지내던 나에겐 기분 좋은 낯섦이었다. 술은 또 어찌나 잘 마시는 지. 우리는 금방 친해져 365일 중 360일을 술집에서 살았다. 그러면서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작은 무역 상사를 운영하기도 하고 여행을 가고 성당 주일학교 교사와 빈민지역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봉사도 열정적으로 함께 했다. 정년 퇴임을 한 언니는 지금도 어린 아기들을 위한 봉사로 주말을 보내고 있다.


언니는 자신의 수호 성인처럼 (리타성녀는 이탈리아 카시아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서 수도 생활을 하신 성녀로 좌절하고 실망한 이들의 수호성인이시다) 주변인들의 구심점이 되어 주었다. 술 잘 사주고 밥 잘 사 주는 언니이자, 누나. 항상 끝까지 남아 술자리를 책임지고 술값을 책임지던 사람. 좌절하고 실망한 사람 곁엔 항상 언니가 함께 했다. 그들이 언니를 찾거나 언니가 그들을 찾아 시련과 아픔을 함께 했다. 때로 통 크게 돈을 쓰기도 했다. 수년 전, 불우했던 공부방 제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안정된 직업을 얻은 뒤 우리를 만나 말했다. 자신의 동네에서 자신만이 유일하게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리타 선생님 때문이었다며 허리숙여 절을 했다. 우린 그날도 술을 많이 마셨다. 그녀가 그 누구에게 먼저 등 돌리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한결같다고 간단히 말하는 것으론 턱없이 부족한 그녀의 '한결같음'은 변덕 많은 내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행동이자 태도이다. 무엇을 하든 누구와 관계를 맺든 그녀는 변함이 없다. 늘 먼저 축하해 주고 함께 슬퍼해 주며 주변을 먼저 돌아본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술값을 내준다.


인생 선배이며 친구이자 형제인 언니. 브런치 글을 빠짐없이 읽어주고 라이킷을 눌러 주는 언니. 글 쓰고 그림 그리는 나를 대견하게 생각하며 기뻐해 주는 사람. 지켜봐 주는 데 달인인 사람. 우리 사이에 성격과 취향의 같고 다름은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다. 나 자신조차도 나에게 성실하지 못하지만 언니는 변함없는 마음으로 우리 관계에 임한다. 뭐 하는 척은 그녀에게 없다. 내 부모, 형제에게도 하지 못하는 속내를 언니에게는 가감없이 내 보인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친구들은 연락이 끊겨 곁에 없는데 언니는 여전히 내 곁에 있다. 누차 얘기하지만 내가 잘해서가 아니다.


어떤 관계에서 변함없는 태도를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가. 언니 덕분에 나는 그 기적을 경험하고 있다. 언니, 늘 고마워. Bravo your life!!!


언니, 다음엔 더 잘 그려줄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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