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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Aug 18. 2022

부산의 파란 계단 풍경

어반 그리고 쓰다


남편은 오랫동안 사진을 찍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카메라 가방을 나타났고 가방에는 니콘 FM2 블랙 카메라가 들어있었다. 한 번은 나를 찍어주었는데 평소의 내 모습과 달랐다.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방향에서 찍는가에 따라 다르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내 왼쪽 모습이 다른 방향보다 낫다는 거였는데 어쨌든 나는 그 사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결혼 한 지 15년쯤 되었을 때 동네에 있던 갤러리를 하나 빌려 그의 사진과 나의 퀼트 작품을 모아 전시를 했다. 친구들은 남편의 사진을 보며 멋지다 말했고 손바느질로 만든 내 대형 퀼트 벽걸이 작품을 보고는 미쳤다고 했다. 돌이켜 보니 나는 창의적인 집중을 늘 갈망했다.


남편은 어딜 가나 카메라를 놓지 않는다. 어디서든 사진을 찍어 내게 보내준다. 그가 나무나 꽃, 사람이나 오래된 골목을 찍으면 평범한 그것들은 흑백 프레임 안에서 아주 특별해진다. 대상을 보는 그의 남다른 안목 때문일 것이다.


부산여행을 간 남편은 역시나 여러 장의 사진을 보내주었다. 그중 파란색의 건물과 계단을 찍은 사진이 예뻤다. 내가 파란색에 특히 끌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보낸 것일까. 평범하고 남루한 일상의 공간을 이렇게 꾸민 것은 그 지역 사람들의 꿈이 담긴 것이다. 꿈으로 만들어내는 풍경은 좀 다르다. 파버 카스텔보다 발색이 편한 프리즈마가 낫겠. 색을 칠하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림을 끝내고 보니 새벽 2시.


뜬금없이 겸재 정선의 경복궁 그림이 생각난다. 인터넷을 뒤져 찾아보니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궁궐의 모습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선의 그림은 조선판 어반 스케치다. 석주만 남은 경회루와 말라버린 연못, 무너져 내린 돌담과 전각의 빈 터들, 뒷 배경의 소나무 숲. 폐허의 적막과 과거의 영화를 기억할 소나무 숲이 깊은 슬픔과 품위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겸재의 그림은 진경산수라고 하는데 어반 스케치도 어찌 보면 같은 지향이 아닌가. 이런 나의 생각이 위대한 화가를 폄하한 것이 아니면 좋겠다. (지식이 천박한 탓이니 크게 허물 삼지 않기를.) 한강을 그린 그의 그림들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그림을 그가 보았다면 진경색필화라고 불렀을까. 


새벽 두 시에 2022년의 부산 풍경을 그려놓고 또 객쩍은 생각이 일었다. 잠은 더 달아났다.



정선 [경복궁] 1745년경, 비단에 담채, 고려대학교 박물관



남편의 사진

부산의 파란 계단 풍경, 파브리아노 14.8 ×21 프리즈마 색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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