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i Dec 06. 2022

말없이 배추전을 먹었다

색연필 그림일기 2


기온이 급강하했다. 서둘러 텃밭의 배추를 뽑아 보일러실에 넣어두고 그중 한 통을 가져와 배추전을 해 먹었다. 뽑아 온 배추는 대부분 잎이 퍼렇고 빳빳했는데 막상 배추전을 부치니 고소한 맛이 아주 좋았다. 31년 되는 결혼기념일이었다.


결혼기념일이니 맛있는 저녁 식사라도 오붓하게 하시라고 며늘 아이가 말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런 제의를 하지 않았다. 남편도 내게 무언가 기념할 만한 일을 하자고도 하지 않았고 나 또한 뭘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할 말이 딱히 없어서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고 남편은 으레 그렇듯 말이 없었다. 


마침 라디오에서  결혼기념일에 너무 큰 것을 바라면 싸우게 된다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서로 바라는 것이 없어서 싸우지 않았고 길게 늘어지는 해 그림자를 바라보며 말없이 배추전을 먹었다. 눈이 올 것처럼 하늘이 뿌옇게 가라앉아 해도 슬그머니 넘어갔다. 아, 막걸리를 사다 놓을 걸, 생각했다.



텃밭 배추로 만든 배추전
매거진의 이전글 잠들지 않는 것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