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수영하는 회원이 수영장에 오지 않았다. 주말이 지난 월요일에도 그다음 날 강습 시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안면을 트고 친분을 나누던 몇몇 회원들이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그녀의 어머니께서 병환 중임을 알아 혹시나 염려들을 했다. 카톡 안부 문자를 읽기만 하고 답이 없는 것을 보고 일이 생겼구나 했다. 카톡을 보낸 다음 날 그녀의 짧은 답장이 왔다.
'엄마 상 치르고 그냥 있어요.'
무슨 위로를 해야 하나. 어머니 마저 돌아가시면 '나 혼자 남는다'며 쓸쓸하게 웃던 그녀에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89세 엄마가 생각나서 바람을 맞으며 땅만 보고 걷다가 집으로 왔었는데.
"꽃가지 하나
무게를 가누지 못해
저 홀로 출렁인다
참새가 앉았다
일어선
자리 "
("어느 참새에 대한 기억" <먼지는 언제 잠드는가> 중에서. 천은영, 현대시)
펜 드로잉에 색연필
참새가 앉았었나 보다. 참새는 앉아 있던 꽃가지에 그 무게를 남기고 날아갔다. 참새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해서 출렁이는 걸 보니 꽃가지는 여리고 가늘다.꽃가지의 출렁임은 참새처럼 연약한 우리 실존의 무게가 아닐까. 참새는 가지에 앉지만 머물지 않고 꽃가지는 출렁거릴 뿐 부러지지 않는다.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돌아갔다'라고 말한다. 세상에 던져지기 전에 원래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산다는 것은 작은 참새의 무게로 '꽃가지 하나 출렁이게 앉았다' 일어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고 시를 읊조리며 생각했다. '그냥 있어요'란 짧은 문자에 나의 모습이 오버 랩 되는 것도 머지않아 내게도 일어날 일이라고 짐작하기 때문이고.
가톨릭에서는 죽음을 '본향으로 가다'라고 표현한다. '본향'은 아버지(하느님)의 고향, 존재가 원래 있던 곳이다. 태어나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무언가에 각자 미쳐 살다가 늙고 병들어 '돌아가는' 곳이 본향이다.우리 삶은 그 본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이다. 여행을 해 본 사람은 안다. 고단하고 긴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안도감과 편안함, 문을 열어주며 반기는 가족을 볼 때 느낀 포근함을 기억할 것이다. 여정을 끝내고 돌아간다는 것은 나를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나의 회한 때문일까, 죽은 이에 대한 순수한 슬픔 때문일까. 내 죽음에 대한 예견 때문일까. 죽음은 슬퍼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의 믿음대로 본향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고 나도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개별적 존재들이고 삶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태도 또한 각기 다르기에 단정할 수 없다. 나의 죽음을 앞에 둔 사람들의 모습도 비슷할 것이다. 누군가는 스스로의 애달픔 때문에 슬퍼할 것이고 누군가는 나를 추억하며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그리움으로 슬퍼할지도 모르겠다. 죽음 너머엔 또 다른 만남이 있고 유한한 시간에서해방된 서로를 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해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눈앞의 상실이기에 애달프다.
얼었던 강이 풀리고 나무엔 물이 오르기 시작했다. 작은 꽃가지 하나 출렁이게 할 뿐인 것이 나의 무게라는 것을, 아니 내 무게는 어쩌면 그보다 더 가볍다는 것을 얼음이 풀리는 강 앞에서 생각한다. 그런데 어쩌자고 자꾸 그 가벼운 무게로 버거운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일까.어쩌자고.
'엄마의 상을 치르고 그냥 있다'는 그녀의 문자를 보고 나는하루종일 시를 읊조렸다. 어머니를 잃은 그녀와 두려움에 마주한 나를 달래고 싶었다. 시가 앉았다 일어선 자리엔 상실과두려움에 아랑곳없이 중력을 거스른 물이 오르고 있다. 그 물이 가지 끝에 다다르면 꽃가지는 환하게 꽃을 피우고 벌과 새들이 날아와 앉았다 일어선 자리엔 또 처음인 듯 조용히 가지가출렁일 것이다.그 출렁임 사이로 어떤 죽음은 가깝고 어떤 죽음은 멀리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