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li Aug 27. 2023

저녁 밥상 차리는 시엄마 아니고 엄마

색연필 그림일기 2


시간은 4시를 넘어가고 있다. 저녁해야 하는데 더위는 절정이고 한숨 자고 싶지만 벌떡 일어나 텃밭으로 간다. 가지가 실하게 자랐다. 두어 개 다가 어슷 썰어 튀겨놓고 마늘 넣고 푹 삶은 닭은 한 김 식혀 살을 발라낸 후 파, 마늘, 후추, 소금으로 양념해 놓는다. 곁들일 반찬은 역시 텃밭의 오이로 새콤 달콤 무친다. 닭곰탕과 가지 튀김, 오이 무침이 오늘의 저녁 메뉴다. 가족이 모이는 9시 30분, 모두 맛있게 먹는다. 땀 흘린 보람이 있다. 아들 내외와 함께 저녁을 먹기 시작한 지 3개월을 넘어서고 있다.


작년 2월, 큰아들과 며느리가 집으로 들어왔다. 아파트 전세 계약이 만료되자 집주인은 전세금 1억을  요구했고 애들은 대출받아 전세금을 올려주는 대신 집으로 들어오는 선택을 했다. 결혼한 지 2년 남짓 된, 이제 30 초반의 젊은이들에게 1억이 있겠는가. 대출받아 1억을 마련한다 해도 그 가치에 해당하는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살고 있던 아파트에 1억을 더 올려줄 만한 가치는 없다고 했다. 억울한 심정이 든다고도 했다. 물론 1억을 요구한 것은 세입자인 애들을 내보내기 위한 심산이었을 터. 애들은 집으로 들어가도 되냐며 우리의 뜻을 물었다.


우리는 애초에 26평과 22평 두 채로 분리해 집을 지었는데 땅이 넓어 두 채를 지은 것이 아니다. 세를 놓아 모자라는 건축비를 충당할 요량이었다. 2층 구조의 건축은 1층 건물을 나란히 짓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든다고 해서 마당을 포기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동안 별채엔 몇 집이 들락날락했고 마지막 세입자와 큰 갈등을 겪으며 마음이 상한 우리는 사람이 무서워 세를 주지 않았고 별채는 비어 있었다.


아들 내외가 집으로 들어왔다는 말에 주변의 말들이 많았다. 부러워하는 시선이 있는 반면, 고부 갈등을 걱정하며 쉽지 않은 동거라는 걱정과 염려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별채독립되어 있고 우리는 적당한 거리 두기를 하며 별 탈없이 지냈다. 그러던 중 집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며느리가 다시 취직을 했다. 아들의 퇴근은 8시, 며느리의 퇴근은 9시. 아이들의 저녁식사가 마음에 걸렸다. 언제 식사 준비를 하고 언제 밥을 먹을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아들은 아들대로 먼 거리의 출퇴근으로 피곤할 터이고 아들보다 더 늦게 귀가하는 며늘 아이 또한 힘들긴 마찬가지다. 아들이 저녁을 준비하는 일도 쉽지 않고 며늘아이 역시 어렵다. 그렇다고 매일 외식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지역의 식당들은 대부분 8시에 문을 닫는다). 저 놈들 맨날 피자나 사 먹을 텐데, 어쩌나. 나도 저녁에 줌수업이 있고(주 4회 줌으로 국어 수업이 있다) 여의치가 않은데, 모른 척할까? 흠... 어쩌나... 처한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1. 애들은 저녁 준비 할 시간이 없다. 2. 내겐 저녁을 준비할 낮 시간의 여유가 있다. 3. 애들보다 내가 음식을 잘한다.  4. 걱정을 안 해도 된다. 5. 나도 사실 바쁘잖아. 이것 저것... 6. 어차피 밥은 해야 할 일이다. 7. 결국 밥 차려 주는 시엄마? 해방되고 싶다며?  7번 항목에 제동이 걸리긴 하지만 엄마표 저녁을 해야 되는 이유들은 분명해 보였다. 지나온 한 때 누군가 내게 이런 도움을 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때가 많았다. 그때 많이 힘들었어... 나는 도움을 받지 못했지만 해 줄 수 있다. 그래, 결정했어!


아들내외는 성실하고 검소하다. 큰 욕심도 야망도 없다. 소박하게 서로 사랑하며 성실히 사는 애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누군가 해 주는 저녁밥이다. 아이들의 삶이 애달프다 해도 그건 아이들 각자의 몫이고 그 몫을 내가 대신 짊어질 순 없지만 밥은 해줄 수 있지 않나. 자식이 힘들 때 힘을 주고 위로해 주어야지, 그것이 부모고 가족 아닌감? 남편에게 이야기하니 수업 때문에 괜찮겠냐고 반문하며 돕겠다고 했다. 소식을 들은 아이들은 반색을 했다. 조금 의외였다. 평소 아들의 성향이면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할 텐데 아이들은 반찬값도 보태겠다며 좋아했다.


일주일 식단을 짰다. 목살 간장조림과 닭볶음탕, 가지 덮밥과 파스타, 부대찌개와 돈 가스, 마파두부와 연어덮밥 등을 만들었다. 주 메뉴뿐 아니라 밑반찬도 만들어야 했다. 장조림, 멸치 볶음, 배추 겉절이, 어묵 볶음, 오이무침, 감자조림 등 2~3개의 반찬을 매일 만들었다. 평소 밥보다 빵을 좋아하는 며늘아이가 잘 먹으니 보기 좋았다. 어느 날 아들이 밥을 먹으며 어머니의 저녁으로 삶의 질이 높아졌다 했다. 기뻤다. 아이들은 퇴근하여 9시 30분이 되면 매일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이 도사리고 있다. 최선을 다 하려는 의도가 언제나 착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나의 저녁 밥상 차리기가 항상 아름다운 미담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선한 마음으로 한 선택과 그에 이어지는 과정엔 긍정적인 결과를 위한 어떤 전제가 필요한데 이 전제는 관계 안에 숨어있다. 선택은 내가 했지만 이 선택이 지속적으로 미담이 되기 위해선 서로의 협력이 필요하고 이 협력은 규칙을 통해서가 아니라 서로에 대한 배려에서 나와야 한다.


줌수업을 끝내고 나와보면 치우지 않은 식탁과 내가 먹을 음식이 남아있지 않기도 했다(저녁을 잘 먹진 않지만 꼭 유달리 배 고픈 날). 어떤 날은 식당의 손님처럼 앉아서 차리는 밥상을 받기만 하는 모습도 있었고 생활비 통장이 빠듯해 장보기가 부담스러운 날도 있었다. 수업이 많거나 피곤한 날에 그런 일이 겹치면 마음이 언짢았다. 이놈들이... 좀 치우고 가지.... 이 엄마도 늦게까지 일한다고, 하는 말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저녁밥상을 차리는 노동보다 불편하고 언짢은 감정을 참는 것이 때때로 힘들었다.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을 간질이는 횟수가 늘어나자 말들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안되는데... 말로 쏟아내면 내 선택이 우스워질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다칠 수 있다. 저녁을 차려주곤 우리 집 개와 밤산책에 나섰다. 감정의 브레이크가 필요했다.


만일 며늘아이가 딸이라도 같은 마음이 들었을까. 딸아이가 늦게 퇴근해 밥 먹으러 왔는데 앉아만 있다고, 설거지도 안 한다고 타박을 할까. 아들은 안 해도 되고 며늘아이는 해야 되나. 제 아버지 보고 배운 것이 그것인데 제 아내 챙기는 아들을 탓할까? 열심히 사는 애들에게 밥이라도 해 주자 마음먹었던 일이 어느 순간 뒷정리를 하네, 마네 좁아지는구나. 누가 해주라고 시켰나? 아니, 애들이 뭘 몰라. 잘못 가르쳤나 봐. 남편이 한 마디 거들었다. 우리가 어른이잖아. 가진 게 없어 돈은 줄 수 없지만 돌봐줄 수는 있잖아. 얼마나 다행이야. 내가 설거지할게. 당신 어려운 거 잘하고 있어. 칫, 할 말이 없군.


아들이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토로하며 퇴사를 생각하고 있다고 한 날, 더위와 피곤함으로  쳐진 아들과 살집 없이 마른 며늘아이가 묵묵히 밥을 먹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직장 생활하느라 힘들어하는 아들, 다리 관절과 손목이 아파 병원에 다니는 며늘아이. 에이, 측은한 것들. 부모들이 살아온 세월을 두 아이는 이제 막 걷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 누구도 예외 없는 노동의 실존이며 각자의 몫이고 또한 우리네 삶이 아닌가. 피투성(세상에 던져짐)의 존재지만 피투성이로 살진 말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려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뿐. 이 사랑엔 조건이 없다. 사랑은 그저 주는 지. 짠고 기특한 것들! 며느리는 아들과 함께 내 품에 들어온 내 아이이다.


나는 저녁밥상 차리기 미션을 조금 바꿔야겠다고 말했다. 너희가 쉬는 수요일과 일요일은 각자 먹자. 해 보니 엄마도 어려운 날이 있더라. 식사준비는 되도록 간단히 하겠다. 식성이 서로 다르니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을 하고 장도 봐주기 바란다. 식사 후 뒷정리는 모두 같이 했으면 좋겠다. 선선히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며늘아이가 좋아한 연어 덮밥

내일은 뭐 먹을까? 연어 좋아하니? 며늘 아이 눈이 커지며 엄청 좋아해요, 한다. 외출했던 애들이 사 온 커다란 연어를 남편이 회를 뜨는 사이, 양파와 간장, 설탕, 후추를 넣고 졸여 소스를 만들었다. 밥 위에 양파 졸인 것을 얹고 그 위에 붉은 연어와 적양파, 부추, 고추냉이를 올렸다. 남은 연어는 회로 먹으라고 따로 담았다. 가족 모두  어느 때보다 맛있게 먹었다. 소식인 며늘 아이가 평소보다 많이 먹어서 보는 내내 흐뭇했다.

"어머닌 왜 안 드세요? "

"어머닌 생선이나 회를 못 드셔."

"헐~~ 어머나... 그런데 연어를... 어머니, 너무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오냐.^^  엄마는 투투랑 산책하러 가니까 뒷정리 부탁해."

"네~ 저희가 정리할게요~. 다녀오세요."

 아들이 설거지를 한다며 일어서고 며늘아이가 배를 두드리며 식탁을 정리했다. 남편 또한 주변 정리를 도왔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는 거지. 최선을 다 해 밥을 해 먹이고 못하게 되면 또 다른 방법이 있겠지. 이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이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방은 아닐 터, 가족을 먹이기 위해 밥을 하는 것은 해방되어야 귀찮은 일이 아니라 귀한 일이다. 저녁밥을 차리는 시엄마가 아니라 가족을 위해 밥을 하는 엄마일 뿐. 누구 말처럼 힘이 센 사람이 하는 거지. 스스로 성장하고 못 하는 것도 아이들 몫이다...


"가족의 핵심은 사랑이야. '어떤 종류'나 '어떻게 꾸려가지'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런 자잘한 점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모르니까 그런 걸 걱정하는 거야."(<물고기에게 물에 관해 묻는 일> 중에서, 캐서린 라이언 하이드 )


읽고 있던 소설의 한 대목이 눈에 들어와 메모하며 오래도록 음미했다. 중요하지 않은 것에 몰두하고 허우적대면서 정작 중요한 사랑을 자주 놓친다. 어우, 또 그럴 뻔했어. 


사랑은 복잡하지 않다. 복잡한 생각을 한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을 핑계를 찾는 것이다. 사랑은 단순한 당위로 시작해서 단순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단순한 행동만을 필요로 한다.  그 결과 또한 단순한 기쁨과 사랑이다. 이 사랑이 우리를 살리고 관계를 건강하게 한다는 것을 제대로 사랑한 사람은 안다. 사랑하고자 마음먹었다면 그 사랑이 어떤 모습으로 파생되든 간에, 이를테면 희생이라든가, 헌신, 인내, 견딤 등의 모습 또한 단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사랑은 주는 것이지 되돌아오는 보상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다. 기꺼이 나의 시간과 열정과 노동과 마음, 재산과 기술을 내주고 또 누군가도 제 것을 내어주며 나를 사랑하는 것이지 내가 사랑했기에 그 사랑을 돌려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제가 달라져야 이런 풍경이 바뀐다는 뜻인가요?" "그게 내 앞의 세계를 바꾸는 방법이지요. 다른 생각을 한 번 해 보세요....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문학 동네)


미래를 상상하면서 그 미래의 가능성을 현재에 산다면, 그렇게 살자고 결심만 한다면 우리 삶의 비극은 극복되고 눈앞의 풍경이 바뀔 수 있다고 소설 속 인물은 말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라고. 해도 해도 서툴기만 한 사랑이지만 제대로 된 사랑을 하고 있는 미래를 상상하고 그 미래를 지금 현재로 가져와 내가 살아갈 수 있다! 멋진 방법인 걸!


투투야. 엄마는 운이 좋아.

(왜요?)

미래를 상상하며 눈앞의 풍경을 바꿀 수 있거던.

(어뜨케요?)

어떻게 하냐고? 네가 어제 먹지 못한 간식은 잊는 거야. 과거는 잊어. 그리고 앞으로 네가 원하는 간식을 상상하는 거야. 오지 않은 미래를 현재에 사는 거지.

(고기, 소시지)

그렇지. 그럼 그 간식이 짠~하고 네 앞에 나타날걸!  

(리얼리? 헥헥헥 )

진짜냐고? 믿어봐. 이랬으면 좋겠다고 상상만 하지 말고 원하는 미래를 지금 현재로 가져와 사는 거야.

(엌, 너무 어려워요 )

눈앞의 풍경이 바뀔 수 있다잖아. 엄마는 이 말의 의미를 알아버렸어. 엄마는 저녁밥상에 엄마가 상상하는 사랑을 넣을 거야. 이게 엄마가 상상하는 미래고 그 미래를 가져다 현재에 살기로 했어.

(뭔 소린지 도통 모르겠지만 엄마가 뭘 알았다니 다행이에요)

내일 메뉴는 뭘로 할까?

(돈가스는 하지 말아 주세요)

왜에?

(튀김 냄새 때문에 괴로워요)

아항~ 냄새 때문에?  ㅋㅋㅋ 알았어. 감자 넣고 갈치조림은 어때? 

(헥헥헥 고기나 소시지는  어때요? ^^)







매거진의 이전글 60살이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