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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Oct 30. 2020

앞산을 바라보며

색연필 그림일기


집 앞에는 산이 있다. 내로라 하는 큰 산은 아니지만 근방의 주요 등산 코스를 서너 개 품고 있어 깊이가 있는 산이다. 그런 산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집은 산과 마주하고 있어서 현관 출입구를 비롯하여 문과 창문이 모두 앞 산을 향해 나 있다. 거실도 안방의 창도 부엌 앞 중정도 모두 산을 향한 방향이어서 집에 들어앉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앞 산을 향해 앉거나 바라보는 위치에 있게된다.


처음부터 땅을 사려는 계획은 없었다. 전세로 옮겨 갈 집을 찾다가 턱없이 높은 전셋값에 밤 잠을 설치다 우연히 땅을 보게 되었는데 그만 마음을 뺏겨버렸다. 매우 양지바른 곳이었고 넓지 않은 평수에 역에서 가까워 그만 덜컥 계약을 했다. 가까운 지인을 찾아가 집을 지어달라 부탁했고 염치없이 각종 신세를 지면서 후다닥 집을 지었다. 이미 계약이 만료된 곳에서 두 달을 더 버티던 중이어서 우리는 조경도 되지 않은 집에 서둘러 이사를 왔다. 5년 전 10월이었다. 이렇게 더운 여름은 몇 십년 만이라며 떠들던 날씨도 10월이 되자 기온이 뚝뚝 떨어졌고 10월 하순이 되자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면 달라지는 풍경을 멍하고 바라보는 일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단풍드는 앞산은....아름다웠다. 이사 와 처음으로 본 앞산의 단풍은 그동안 겪은 수고와 고생에 대한 보상같았다.


봄에 새순이 돋을 때, 녹음이 짙은 날 해가 지면서 서서히 어둠에 잠길 때, 요즘처럼 산이 물들 때, 쌓인 눈 때문에 햇살 아래 반짝일 때, 기묘한 색깔로 노을이 펼쳐질 때 앞 산은 아름답다. 지금처럼 단풍이 들기 시작하면서 해가 넘어가는 순간은 특히 더 아름답다. 산 위는 넘어가는 해 때문에 환히 빛나는데 산 아래쪽은 이미 어둠에 잠기면서 산은 깊은 심연으로 가라 앉기 시작하고 어느 새 해가 넘어가면 산은 하나의 덩어리로 웅크린 채 어둠 속으로 어둠 속으로 잠기다가 그대로 어둠이 된다.

어둠에 잠기기 시작하는 산

산 위쪽엔 아직 햇살이 남아 있지만 이미 산은 어둠에 잠기기 시작했다. 해가 환히 세상을 비출 때는 오히려 드러나지 않았던 나무들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비로소 하나하나의 나무로 개별성을 얻는다. 나는 산 전체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나무가 눈에 띄는 순간도 좋아한다. 전체 안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나무 하나하나에 특별한 애정이 생기는 것도 이 순간이다. 어떤 나무가 어느 자리에 있어서 봄에 제일 먼저 새순을 틔우고 가을엔 어떤 색으로 물이 드는지 알 수 있는 때가 바로 지금 해가 넘어간 직후라는 것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다. 나의 보이지 않는 깊은 곳의 결도 그렇지 않은가. 해가 넘어가면서 산의 어둠과 함께 내 안 깊은 곳의 어둠과 그 어둠 속에 웅크린 나를 본다.

앞산은 날마다 내 앞에 있고 내 생각의 나무 또한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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