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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Nov 07. 2020

전나무 숲에 내리는 눈

색연필 그림일기


인디언들은 열두 달의 명칭을 그들만의 세계관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그중에서 11월을 '물이 나뭇잎으로 검어지는 달', '산책하기에 알맞은 달'이라고 했고 또 '만물을 거두어들이는 달',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숲의 11월은 그들이 표현한 바로 그대로다.

11월 전나무 숲에는 때 아닌 눈이 내린다.


숲에 내리는 눈 - 나뭇잎들

숲에 바람이 불자 잎들이 떨어진다. 물기 없이 바싹 마른 잎들이 저마다의 색과 모양으로 스르륵~ 툭, 하며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베어낸 나무 밑동 위로 떨어지고 있다. 뺨을 스치는 약간의 바람에도 작은 새가 소리 없이 날아올라도 잎들은 싸라락~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그 소리가 영락없이 깊은 겨울밤 눈 내리는 소리와 닮았다.


전나무의 짧고 뾰족한 잎과 구멍 난 상수리나무잎, 갈참나무의 잎, 바싹 말라 가장자리가 말린 밤나무 잎, 물에 슬쩍 젖은 손수건 같은 칡덩굴의 잎들이 따로 또는 한꺼번에  떨어진다. 진달래나무의 작은 잎들도 분홍 꽃잎을 미처 지우지 못한 채 제 나무 밑에 수북이 쌓여 있고 손바닥보다 넓적한 일본목련나무의 잎은 불경한 삐라처럼 여기저기 허옇게 어지럽다. 숲에는 때 아닌 눈이 쌓여 걸음을 옮길 때마다 푹신푹신한 것이 발은 피곤을 모르겠다. 숲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나는 세상을 잊는다.


   "첩첩한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의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 "


천 년 전 신라인 최치원이 '흐르는 물'로 경계를 삼아 자신과 세상을 떼어놓았듯이 나는 이 숲을 내 주변에 둘러놓고 간절히 세상을 잊는다. 남의 나라 선거에 시시비비 하는 매스컴의 수선도 코로나 위기도 내 가슴의 통증이 주는 현재의 두려움도 확신할 수 없는 은퇴 후의 미래도 모두 잊는다. 수선스럽고 번잡하며 부끄러움을 모른 채 이익만 추구하는 이 세상의 논리에서 나를 떼어놓는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나의 애매한 실존도 떼어놓고 자신은 세상을 버리고 싶으면서 젊은 아들에겐 도전하여 원하는 것을 얻으라고 말하는 나의 이중성도 훌훌 떨어 버린다. 쓸쓸한 서술어 '~싶다'로 돌아오는 가난한 나의 염원도 숲에 내리는 저 눈을 보며 잊는다.


가만히 호흡을 정리하고 서 있으니 온통 사라락 거리는 소리로 미련 없이 잎을 비워내는 숲.

비워내지 못하고 또 다른 염원만 채우는 나.

숲은 겨울을 준비하고 더 나아가 이듬해 봄도 준비하고 있는데 나는 한 발 앞도 잘 딛지 못하고 자꾸 미끄러진다.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티 내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숲에서 나는 겸허해지고 깊어지고 싶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 하지만 반복되는 순환을 통해 끊임없이 변하는 숲처럼 날마다 변화되는 사람이고 싶다.


잎들은 숲에 고스란히 떨어져 다시 숲을 이루기 위한 시작이 된다. '만물을 거두어 들이'나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숲. '산책하기에 좋은'달 11월의 숲은 흔하지만 흔하지 않은 일상의 선물이며 보물이다. 그런 숲에서 나는 자발적 고립을 꿈꾸며 나뭇잎이  눈이 되어 내리는 숲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숲의 햇살
포토샵으로 표현한 색연필 그림 햇살^^


*인용 시 ; 최치원,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칠언절구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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