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글을 읽는 순간 내가 쓴 글이 아닌가 싶었다. 처음 숲으로 가는 길을 알고 난 후 일기에 적은 문장이었는데 우연히 책을 읽다가 내가 쓴 문장과 같은 이 문장을 읽고 놀랐다. 나도 그랬다. 빌 브라이슨이라는 사람이 숲으로 사라지는 길을 발견하고 애팔래치아 종주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도 숲으로 가는 길을 발견한 이후 걷기를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트래킹 차림의 사람들이 동넷길을 따라 길을 올라가는 모습을 종종 보곤 했다. 어디로 가는 걸까? 궁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의 한 무리가 청명한 햇살 속을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위쪽으로 난 길은 막다른 동넷길인데 거기 뭐가 있다고 저리 가는 것일까? 다른 길이 있는 거야! 충동적으로 모자를 집어 들고 서둘러 그들이 사라진 길로 가보니 동넷길 중간쯤 오른쪽으로 작은 이정표가 보였고 그 이정표는 숲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계곡물이 흐르는 옆으로 좁은 길이 이어지더니 이내 그늘 진 시원한 숲이 나왔다. 숲은 입구부터 우거져서 제법 어두웠고 길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이어서 나는 되돌아왔다. 다음 날 제대로 장비를 챙겨 가보니 그곳은 한낮에도 시원하게 그늘이 지는 숲길이었고 서너 개의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알고 보니 물레길이라고 알려진 걷기 코스의 하나로 고맙게도 그 길은 바로 집 앞에 있어 언제든 숲길로 향할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전나무 숲과 선물 같은 약수터가 있는 곳. 그 날 이후 나는 이 숲길을 걸었고 주말에 가족과 함께 걷다가 본격적인 걷기를 시작한 후는 거의 날마다 걷는 곳이 되었다. 나의 걷기는 이 숲길을 발견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매일 걷기를 하는 나는 내가 걷고 있는 것이 아직도 낯설다. 기온이 -22도를 가리킨 날 처음으로 걷기를 망설였다. 너무 추운 거 아냐? 남편도 춥다고 쉬라고 했다. 그러나 1시가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양말을 꺼내 신고 따뜻한 물을 따르고 있었다. 보통날보다 단단히 채비를 하고 나간 나는 강한 바람을 맞으며 익숙하게 산을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날 좋은 날 걷는 것과 달리 힘들었지만 그만큼 걷는 것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날이다. 바람이 많이 불거나 기온이 낮은 날은 내 호흡과 내딛는 발소리가 더 크게 전해진다.
눈이 많이 내린 날 아침은 눈을 밟으며 걸었다. 눈길을 걷는 것은 마치 모래사장을 걷는 것 같다. 평지를 걷는 것보다 당연히 힘이 많이 들지만 뽀드득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날이 일년에 몇 번이나 될까. 이렇게 눈이 많이 왔는데 누가 걷겠어? 아니다. 나보다 앞서 벌써 숲길에 발자국을 남겨놓고 다녀간 사람들이 있다. 아주 더운 삼복더위에 라이딩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이 날씨에 미친 거 아니냐고 했던 것을 사과한다. 이런 날씨에 꼭 걸어야겠어? 내가 걷고 있더라. 삼복더위의 라이딩도 -22도의 날씨에 걷는 것도 그저 어제처럼 하던 것을 하는 것일 뿐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날씨에 상관없이 자전거를 타고 걷기에 나서는 것이리라.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다. 나를 보고 점차 놀라고 있다. 남편은 걷기를 지속적으로 하는 내 모습에 놀라고 다른 이들은 달라지고 있는 내 모습에 놀란다. 특히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이 많이 놀란다. 옷을 입어보니 그들이 왜 놀라는지 알겠다. 옷이 작아서 고민이었는데 이제는 옷들이 커져서 고민이다.
어느 날 나는 숲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고 매일 걷는 사람이 되었다. 몸의 변화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과일 뿐이다.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설명할 수 없는 변화는 따로 있을지 모른다. 어젯 밤 꿈엔 지리산을 걷는 나를 보았고 내일 밤엔 애팔래치아산 어딘가에 사는 흑곰과 마주치는 꿈을 꿀지도 모르겠다. 바쁘다고 핑계를 대며 사실은 나를 방관한 채 *'게을러 터진 수년간의 생활을 바로잡을 기회'를 나는 잡았고 앞으로도 계속 그 기회를 잡고 싶다. 해마다 DMZ 평화 순례길을 가는 남편이 올해는 나를 새 스텝으로 데리고 가려고 곁눈질을 하고 있다. 또 다른 '기회'는 남편이 먼저 엿보고 있는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