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km를 걸어 수영장에 갔다. 라커룸을 홀로 쓰고 수영장 레인을 독차지했다. 다시 7.6km를 막 걷기 시작하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정류장을 지나왔을 뿐 아니라 지금은 버스가 다니는 시간이 아니다. 잘 오지 않는 택시를 부르거나 그냥 걸어가야 한다. 얼핏 보니 남은 거리는 약 50여분. 다행히 세찬 비는 아니다. 비가 굵어지지 않길 바라며 걷기로 한다. 방수가 되는 새 운동화를 신고 나온 첫날. 기능 확인이 되겠군.
비를 맞으며 시청 앞 지하철역에서 과거의 여자 친구를 우연히 만난 노래를 듣는다. 비를 맞으며 맘 딸기 농장을 지나고 꼭대기에 새집이 있는 키 큰 낙엽송도 지난다. 비를 맞으며 줄지어 선 벚나무들을 지나친다. 백구 한 마리가 비를 맞으며 나를 흘깃 지나쳐간다. 귀에서 흐린 하늘에 편지 쓰라고 외치는데 비는 여전히 내린다. 대규모 비닐하우스 농장에도 늘 조용한 기숙학원 건물에도 비가 내린다. 옛사람을 기념하는 비석을 지나는데 비가 많이 굵어졌다. 모자에 내리는 빗소리가 음악소리보다 선명하다. 투투 둑... 투둑
동넷길에 접어들자 온 몸이 서늘하고 손이 시리다. 한기가 느껴져 우울해진다. 외투 안쪽까지 젖지는 않았으나 겉은 살뜰히 젖었다. 옷이 무겁다. 방수 운동화 빼고 다 젖었다. 옷이 젖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걷기에 최적인 날만 내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그러나 산다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에게 맑은 날만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니 말이다. 흐린 날과 비 내리는 날,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과 청명한 날도 내게 주어진 시간이다. 날씨에 관계없이 나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비 내리는 오늘, 나는 걷기로 선택했으니 비를 맞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피할 수 없을 때 온전히 맞는 것 또한 선택이다.
바람이 부는 날도 눈이 내리는 날도 비가 내리는 날도 걸은 나는 드디어 걷는 사람, 워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