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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 May 25. 2021

탱이

색연필 그림일기


우리 집 수문장 이. 2010년 생이다. 11살. 수컷. 최장길이(어깨부터 엉덩이 끝까지) 약 70cm, 몸무게 30킬로가량 되는 대형견이다. 눈 위의 점박이를 '탄'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네눈박이 탄이다. 아빠견은 로트 와일러, 엄마견은 골든 레트리버 몽실이었다. 몽실이는 10마리의 새끼들을 낳았고 이는 그중 한 마리였다. 몽실이 새끼들은 모두 건강했고 우리 부부는 온통 새까만 이가 눈에 들어와 집으로 데리고 왔다. 태어난 지 20일 되는 날이었고 내 품에서 컸다. 이의 형제들은 이처럼 주변 이웃들에게 분양되었으나 이런저런 이유들로 모두 죽고 이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이제 나이를 먹은 이는 온통 까맣던 털이 부분적으로 모견의 털과 같은 갈색으 변화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주인과 개가 많이 닮는다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내가 생각해도 대부분 틀리지 않는 말이다.

우리 가족은 조용한 편이다. 말이 많지 않고 정적인 사람들이다. 구성원들이 그러니 집안은 늘 조용하다. 그래서일까. 이도 조용하고 점잖다. 웬만해선 짖지 않는다. 외부인이 접근해도 집 마당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짖지 않고 주시한다. 자주 방문하는 택배 기사님이나 우체부와도 친해 이는 잘 짖지 않는다. 일 년에 서너 번 방문하는 지인들도 잊지 않고 이는 반가워한다. 이런 이가 짖는다는 것은 평소와 다른 무언가가 일어났다는 의미다. 낯선 차가 집 앞에 주차를 거나 독사가 마당에 나타났을 , 비가 무섭게 내려 주변이 온통 물바다가 될 때, 꿩이 숲에서 날아오를 때 이는 짖는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이가 짖으면 나와봐야 한다고 말하며 기특해한다.


간식에 집중하는 탱이

이는 제 부모의 기질대로 로트와일러의 사나움을 유감없이 드러내는가 하면 골든 레트리버 특유의 친화력과 온순함도 지니고 있다. 대부분 착하고 온순하지만 이가 유달리 사나워질 때가 있다. 바로 백발의 할머니가 나타날 때다.


우리는 가을 수확철이 지나면 이를 풀어놓곤 했다. 빈 들판에서 신나게 뛰어놀다가 해가 지면 부엌 앞에 와 앉아있곤 했는데 기온이 내려간 날, 저녁때가 되어도 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개울 건너 진순이와 살림을 차린 걸 안 우리는 며칠 기다리기로 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 진순이네 집에 가보니 이는 없었다. 이장님께 전화를 넣고 기다리던 중 보름이 넘어 나타난 이는 다리 하나가 부러지고 한쪽 눈알이 탈출된 심각한 부상을 입고 돌아왔다. 그 이후로 이는 흰머리의 할머니들에게 사납다. 아마도 가출 당시 동네 할머니에게 상해를 입은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탱이같은 대형견을 입마개도 없이 외부에 풀어놓으면 꽤 큰 벌금을 문다는 이장님의 권고와 이의 안전을 위해 이후 이는 묶였다.


탱이와 함께 우리 가족은 두 번째 이사를 했고 저녁에 잠깐씩 하는 산책에 목이 마른 탱이를 보면서 녀석이 나이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풀어놓자고 목소리를 모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넓지 않은 마당이지만 출구가 많았다. 탱이를 통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했다. 목재상에서 나무를 주문한 아들은 며칠간 뚝딱거리고 페인트칠을 하더니 집 앞뒤로 새로 대문을 달아 탱이를 통제함과 동시에 마당에서 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풀어주었다. 우리는 탱이 못지않게 해방감을 느꼈다. 신이 난 탱이는 마당을 누비며 영역 표시를 하였고 몇 년간 가꾼 잔디와 꽃밭은 탱이의 발길에 초토화되었다. 막 피기 시작하는 꽃들이 망가지는 것은 각오한 것보다 더 속이 상했다. 그러나 명확히 알게 되었다. 탱이의 자유가 우리의 소망이었다는 것을.


다른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에 적정선은 없다. 내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선택 앞에 적당한 희생과 양보는 사실 허구다. 그저 내 것을 주는 선택이 있을 뿐이다.  년간 가꾼 잔디와 꽃밭이 망가지는 것을 보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꽃과 나무, 잔디의 가치는 탱이의 자유로움보다 덜하거나 더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내 기쁨을 포기한 것은 탱이에 대한 우리의 애정 때문이다. 우리를 향해 신나게 달려오는 탱이를 보면 기쁘고 그 발길에 짓뭉개지는 꽃과 잔디에 가슴 아픈 것 모두 우리의 사랑이다. 보호와 생존을 책임지고 서로 사랑하며 한 집에서 일상을 함께 하는 것, 이해타산적 세상의 계산법이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가족이 아닌가. 소파를 거덜 내는 고양이들을 탓하지 않는 내 친구는 기꺼이 집사가 되어 행복하다며 내겐 보여주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그 마음을 아는 우리는 탱이가 잔디와 꽃밭을 망칠지언정, 손님이 올 때마다 번거로운 소동이 일어날지언정 우리와 오래 귀한 생명으로 안녕했으면 좋겠다. 각자의 영역에서 함께 편안했으면 좋겠다.


탱이가 꽃밭 울타리를 치고 있는 내게 와서  자기 발을 내 무릎에 올려놓고 잡아달라 한다. 녀석이 사람에게 애정을 드러낼 때 하는 행동이다.


"탱이야, 일하고 있잖니. 부디 꽃밭엔 영역표시 하지 말아줘. 내가 얼마나 슬프다구"


녀석이 귀를 납작하게 눕힌 채 꼬리를 치며 나를 올려다본다. 내게 발을 맡긴 채 앉아서 함께 앞산을 바라본다. 우리 식구 아니랄까 봐, 과묵한 놈. 코를 만져주니 좋은지 더 크게 꼬리를 흔든다.


" 탱이야, 내 다리 치지 마. 아파!"


망중한 중인  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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