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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재희 Jun 05. 2019

에필로그

Epilogue

30대 중반에 퇴사를 마음먹고 유학을 통해 국제기구에 자리잡기까지의 지난 5년은 정말 정신없이 지나갔다. 한 순간도 일상이 무료하게 느껴질 여유가 없었다. 항상 새로운 상황과 도전이 주어졌고, 매일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느꼈다. 인풋이 굉장히 많았고, 그런 인풋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면서 나의 언어로 정리해 볼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속되는 불확실성의 압박으로 인해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 머리 한편에는 항상 ‘어떻게 자리 잡고 먹고살지’에 대한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남는 시간에는 Job posting을 뒤지거나 지원하려는 포지션에 맞게 이력서와 cover letter를 작성하는 것이 일이었다. 그렇게 만성 저강도 스트레스에 짓눌려 한 해 두 해 살아가면서 나의 기억은 점점 옅어져 갔다. 유학을 위해 미국에 처음 왔을 때는 기록하거나 나누고 싶었던 새로운 경험들이 몇 년 지나자 일상의 당연한 것들이 되었고, 처음의 신선한 느낌은 사라져 갔다.


회사의 정규직이 되면서 드디어 지독했던 불안감이 상당 부분 가셨다. 동시에 예전 한국에서의 익숙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시간이 정말 훌쩍 간다. 매일 비슷한 일상이 반복되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돌아보면 ‘내가 이 회사에 이렇게 오래 있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앞으로의 내 인생이 다시 그런 트랙 위에 올라섰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 차려 보면 몇 년은 훌쩍 지나가고, 내가 치열하고 정신없이 살았던 시절의 기억은 (물론 지금도 어느 정도 치열하게 살고 있습니다만) 점점 옅어질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래서 기억들이 완전히 퇴색되기 전에, 가급적 1년 안에 지난 5년의 기억을 기록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5년이라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풀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은 기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겪은 일을 오늘 쓰는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몇 년이 지나도 기억에 남을 만큼 강렬한 기억 위주로 쓰게 되고 일상에서 느꼈던 소소하지만 싱싱한 기억들은 상당 부분 증발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아쉽기는 했지만, 이렇게라도 써내고 나니 그나마 안도감이 든다.


개인적인 글이지만 한편으로는 글을 공개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좀 더 객관성을 담보하거나 독자의 관점에서 도움이 되는 글을 써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은 그렇게 해도 실제로 잘 되지는 않았다. 너무 오래 굶었다 밥을 먹으면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허겁지겁 음식을 목구멍에 밀어 넣게 되는 것처럼, 5년 동안 쌓아놓은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니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렇게 쓰다 보니 독자들에게는 다소 불친절한 글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다 읽고 여기까지 와 계신 분들에게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양재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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