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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라 Jan 27. 2022

벌새의 선물 2-다른 새들의 패션쇼

나의 벌새 이야기 13

벌새가 떠나고 부엌 뒷문 유리창을 개방한 후부터 나에게 새로운 증상이 생겼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아침일수록 새로운 기대감에 부푼 채 계단을 내려가는 일이다. 침실이 있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기가 무섭게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간다. 뒷문 유리창이 가까워지면 발걸음을 죽이고 살살 다가가서 유리창밖을 내다본다. 날씨가 갑자기 변했다는 건 어딘가 다른 곳에서 바람이 불어왔다는 것이고, 그 바람을 타고 이동한 철새 무리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10월 19일, 기온이 10℃ 아래로 떨어진 그날 아침엔, 한 무리의 작은 새들이 뒤뜰 윈터베리 나무와 소나무숲에 내려앉아 식사를 하면서 와글와글 재잘재잘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몸색깔이 밝은 색이 아니어서 정확히 모양을 분간하기 어려웠는데, 그 중 몇 마리는 나의 들깨밭에 숨어서 들깨 디저트를 즐기고 있었다. 이 새들도 남쪽으로 마이그레이션 하는 중에 들린 모양이었다. 유리창에 바짝 붙어 서 있는 커다란 곰같은 내 모습이 부담스러웠는지 새들은 요리조리 피하며 깻잎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감 넘치는 새 한 마리가 토마토 지지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존스노우의 '나팔꽃벤치'였던 토마토 지지대는 이제 다른 새들의 런웨이(runway)가 되어 있었다. 


존스노우가 즐겨 앉던 토마토 지지대에 앉은 '블랙 뜨로티드 블루 와블러(Black Throated Blue Warbler)'

당당히 햇빛 조명 아래 버드워크(birdwalk)를 하며 포즈를 취하는 새 모델을 놓칠새라 얼른 카메라를 들어 증명사진부터 찍어두었다. 나중에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블랙 뜨로티드 블루 와블러'라고 했다. 보시다시피 얼굴과 목은 까맣고, 등은 하늘빛과 초록빛이 도는 회색이다. 와블러는 휘파람새 또는 솔새로 번역이 된다. 노래하는 소리가 사람이 부는 휘파람 소리와 비슷하니 푸른 휘파람새라고 불러주기로 했다. 이들도 기온 변화로 인해 곤충들이 사라지자, 새로운 먹이를 찾아 남쪽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더 자세히 보라고 다양한 포즈를 취해주는 푸른휘파람새 모델!

이렇게 새로운 새들이 오면 기존에 머무르던 다른 새들은 긴장하지만 특별히 싸움을 벌이는 것 같지는 않다. 가을이어서 나무마다 열매가 풍부하게 달려 있었고, 나의 들깨밭에는 꽤 많은 양의 들깨가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들깨밭에서 포식을 한 후 몸이 무거워진 새들은 토마토지지대에 올라 바람커피를 한 잔씩 마시며 주위를 둘러본 다음 길을 떠났다.   


노랑궁뎅이 솔새

이 지역 사람들에게 '버터벗'이라 불리는 작고 귀여운 노랑궁뎅이 솔새도 토마토 런웨이에서 포즈를 취했다. 나는 버터벗이 바라는 대로 카메라를 들고 여러번 셔터를 눌렀다. '버터벗(노란 궁둥이란 뜻)'이지만 궁둥이만 노란 게 아니라 겨드랑이쪽 깃털도 노란 색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는 테라스 바닥에 놓아둔 물그릇에 '노래참새'라 불리는 멧종다리가 물을 마시러 와서 포즈를 취했다. 한국에서는 이런 새들을 그냥 '참새'라고 하지만 참새도 종류가 참 여러종류이다. 참새는 흔하고 예쁘지 않다고만 생각했는데,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얼굴을 보니 몹시 영리하고 귀엽게 생겼다. 


'노래참새'라고 불리는 멧종다리. 노래소리가 아름답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참새가 다른 새들보다 수적으로 우세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다른 새들에 비해 훨씬 용감한 데가 있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이사온 후 며칠간 새들을 위해 뒤뜰에 쌀을 뿌려둔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새들이 한 사흘간 입도 대지 않았고, 쌀은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껍질이 있는 곡물 씨앗들만 보다가 도정이 된 하얗고 투명한 쌀을 보자 경계심이 들었던 모양이다. 


나흘 째 되던 날 아침에 보니, 참새 한 마리가 와서 쌀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부터 다른 참새들도 쌀을 나눠먹고 있었다. 다음날인가부터는 다른 새들도 쌀을 먹기 시작했다. 들깨에 대해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나는 이사온 다음 해부터 깻잎밭을 일궜는데, 그해 가을 처음으로 들깨가 열렸을 때에는 새들이 입도 대지 않았었다. 미국의 새들에게는 너무나 이국적인 향과 맛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해부터 새들이 먹기 시작했고, 역시 참새들이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것을 보고 참새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뒤뜰에 상주하는 새들중에서 가장 조심스러운 새들이 카디널이다. 이들의 몸색깔이 주홍색에 가까운 빨강이어서 '추기경(cardinal)'을 떠오르게 한다. 추기경의 옷색깔을 닮아서 이 새들 이름을 카디널로 붙인 것인지, 이 새들 몸색깔처럼 붉은 옷을 입기 때문에 추기경들을 카디널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평소처럼 수컷 카디널은 조심 또 조심 주위를 살피고 경계하면서 슬금슬금 씨앗을 향해 다가온다. 그러고는 해바라기 씨앗만 골라서 부리로 껍질을 비벼 까서 먹은 후 자리를 뜬다.


색깔이 추기경의 옷색깔과 같아서 '카디널'이라 불리는 빨간새. 홍관조라고도 한다. 

카디널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자세히 한번 쓰겠지만, 성격도 유순하고 부부 사이가 좋으며 부부가 동시에 열심히 새끼를 키우고 교육하는 가정적인 새들이다. 이 새들이 사는 모습을 매일 보다보니, 자식을 내팽개치는 인간 부모들의 소식을 들을 때 내 입에서 자연스럽게 "이 새만도 못한"이라는 욕이 나왔다.    


'앵그리버드'는 아마 이 카디널을 모델로 삼았던 것 같다. 카디널은 화를 거의 내지 않는, 착하고 가정적인 새들이다.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도통 가만히 있는 장면을 찍기 어려운 캐롤라이나 렌도 사진을 찍어달라고 포즈를 취했다. 평소처럼 꼬리를 바짝 치켜든 포즈를 찍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꼬리를 조금 내린 모습만 자꾸 취한다. 아마 빨리 움직여야 할 때에는 꼬리를 바짝 치켜드는 게 편하고, 가만히 머물러 망을 보거나 할 때는 꼬리를 내리는 동작이 더 편하기 때문인가보다. 


너무나 빨리 움직여서 ADHD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은 '캐롤라이나 렌'. 그러나 귀엽다. 


한참동안 새들의 찍새 노릇을 하다 보면 남편이 부엌으로 와서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고, 그렇게 나의 하루 일과가 시작되었다. 이제 내가 하루 중에 존스노우와의 이별을 떠올리는 횟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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